기독교인의 인식론

취학 전 아이들을 둔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던지는 엉뚱한 질문에 자주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 지능에 따라서 약간씩 질문의 차원을 달리하지만 아이들은 대개 어른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붓는다. 그들의 호기심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현상이다. 새들은 왜 날아다니는가. 하늘은 왜 파란색인가. 나는 어디서 나왔나. 바다는 왜 저렇게 넓은가. 눈은 왜 두개인가. 설탕은 왜 달콤한가. 대충 이런 것들인데, 어떻게 보면 유치한 것 같지만 사실은 사물의 본질에 가까워지려는 치열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질문행위는 그들이 주변세계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징후다. 감각적이든 이론적이든 그들의 인식세계 안에 많은 사물과 그 관계가 어렴풋이나마 들어옴으로써 그런 질문을 갖게 된다. 지금껏 주변의 사물에 대해 거의 본능적인 반응에 머물다가 생각을 통한 반응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결국 성장한다는 것은 주변세계를 어떻게 인식해 가는가 하는 그런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대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그런 주변관계의 중요한 요소들을 내팽개치고 다시 본능적인 감각범주로 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근본에 대한 질문 없이 습관적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굳어진 사회 틀 안에 갇혀서 주변세계의 새로움에 눈을 떠가던 아동기의 질문들을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 모든 세계질서가 너무나 당연해서 더 이상 질문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왜 학교에 가야하는지, 돈을 왜 벌어야하는지, 결혼은 왜 해야 하는지, 정부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무언지, 자본주의는 과연 선한 경제제도인지, 왜 자기 집을 소유해야만 하는지, 자가용을 타고 다녀야 할 이유가 무언지, 우리는 우리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모든 일들을 고정불변의 원칙으로 무작정 하고 받아들이고 그 안에 적응하려고만 애를 쓸 뿐이지, 그것 자체에 대해 별로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앞서 말한 대로 사람이 성장한다는 것, 성숙해 간다는 것은 주변세계를 보다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과정이어야 할 텐데 실제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인 교육이나 정치나 사회제도 등 모든 현실들은 그런 시야를 갖지 못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주변세계를 신비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어머니에게 질문을 퍼붓는 아동들 보다 훨씬 못한 삶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보아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과연 어떤 신앙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는 기독교인의 인식론, 생각의 근거와 태도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 우리는 두 가지 극단적인 흐름 안에 사로잡혀 있다. 하나의 흐름은 신앙의 문제를 맹목적인 열광주의로 처리해 버리는 태도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이것저것 심각하게 생각할 게 뭐 있는가, 그저 무조건 믿으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이 배워온 신앙습관만을 거의 조건 반사 식으로 지켜나가는 걸 신앙이라고 확신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이들의 신앙형식을 용납하지 않는다. 설교를 듣더라도 문자적인 의미만을 단순하게 채택하는, 이미 굳어진 틀로만 받아들이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보다 합리적이고 진리론적인 근거에서 접근해 보려는 모든 노력을 불신앙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설교는 단순히 성경에 있는 것만을 말해야 하며 그 이외의 것을 보충하는 것은 말씀의 순수성을 해치는 것이라고 본다. 매번 같은 내용의 설교를 듣더라도 ‘콩나물시루에 물주기’ 식으로 신앙의 성장이 있다고 강변한다. 이런 태도를 갖는 한 성경과 하나님과 구원 등과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론적 이해가 허락되지 않는다. 무조건 믿으라는 강요만 넘쳐날 뿐이다.
두 번째의 흐름은 일종의 냉소 내지 무관심이다. 점차 그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이들은 신앙적 인식과 실천을 무시하면서 철저하게 지성과 합리성만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다. 사랑이다, 믿음이다, 소망이다, 하는 말 자체를 순전한 관념으로 치부해 버리고 세속적 삶에만 가치를 부여한다. 이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일종의 종교적 교양을 유지해 나가려는 데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전통, 그 말씀, 신앙적 경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역시 생각하지 않는다. 정기적으로 골프 연습장에 나가듯이 교회에 나갈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인의 건강한 인식론적 기초가 무엇인가를 물어야겠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떤 기준에 따라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다. 대답은 사실 매우 간명하다. 기독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해 나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기독교인의 인식론적 기초가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구 호 처럼 외쳐지는 ‘예수, 천당!’이 가리키는 바의 그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의 근본에 대한 진지한 물음 안에서만 그 대답이 주어질 수 있는 명제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매번 입으로 고백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에 대해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구원, 영생, 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나 아예 입에서 내놓기조차도 꺼리는 사람이나 막론하고 진지한 인식의 과정이 없다. 그러다 보니 앞서 말한 대로 열광주의로 흐르던지 냉소주의로 흘러가 버리고 만다.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건 신앙에 대한 진지한 생각, 그것이 실행되어야 할 세상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다. 아동들이 주변세계를 인식해감으로써 갖게 되는 근본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들은 신앙의 세계에서도 적용된다. 생각과 질문을 닫아둔 신앙은 결국 이데올로기에 떨어지게 된다. <199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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