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도를 드리는가?

한국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기도는 모든 한국교회가 집중하고 있는 신앙행위다.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자’는 일반적 구호에서 읽을 수 있듯이 기도는 모든 신앙행위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새벽기도회, 특별기도회, 철야기도회, 산상기도회, 24시간 연속기도회, 40일 특별기도회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종류의 기도회가 실행되고 있다. 경치가 괜찮은 산속에는 기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기도원에서 소나무 둥치를 부여잡고 밤새도록 소리 높여 기도하는 이들이 저지 않다. 아무개 기도동지회라는 이름의 모임도 많다. 기도에 대한 책들도 많이 나왔고 다른 것 보다 잘 팔리는 것 같다.
이렇게 기도를 많이 하는 이유는 아마 한국 사람의 기질이나 정서와 연관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의 선조들은 아들을 낳기 위해서, 혹은 아들이 장원급제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절에 가서 정성 기도를 드리곤 했으며, 돈이 없거나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은 자기 집 뒤뜰 장독대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며 살았다. 어떤 절대자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현실 문제를 풀어가려는 그런 자연발생적 심리가 우리 민족에게 뼛속 깊이 사무쳐 있는 것 같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도 무속인들이 전국적으로 60만 명이나 된다고 하는 걸 보면 역시 우리는 일종의 숙명주의에 볼모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기독교의 기도가 그런 무속적인, 혹은 불교식의 소원성취를 위한 종교행위와 똑같은 건 아니지만 심리적 밑바탕에는 같은 모티브(동기)가 깔려있다고 보아야하겠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드리는 기도는 잘못된 것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 기도교인은 기도를 드려야 한다. 사도바울의 편지에 보면 교인들을 위해서 자신이 간절히 기도했으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부탁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도 분주한 가운데서도 한적한 곳에 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막1:35).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도하기를 힘썼으며(행2:42), 베드로와 요한은 정기적인 기도시간에 따라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다(행3:1이하). 구약에서 엘리야나 다니엘, 그 외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입장을 호소했다. 시편은 거의 다윗이 드린 기도문이다. 따라서 성경을 기초한 신앙생활을 한다면 당연히 도를 드려야 한다.
기독교인들이 기도를 해야 한다는 건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인격적으로 생각한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께 아뢰는 걸 기도라고 한다면 그걸 듣는 대상이 있어야 하며 그 대상은 그 기도의 내용을 듣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로 부터 신약에 이르기 까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는 곧 기도를 통해 관계된다는 걸 뜻했다. 만약 하나님이 컴퓨터와 같다면 우리가 굳이 기도를 드릴 필요가 없다. 컴퓨터는 거의 만능에 가깝지만 인격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식이 부모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듯이 하나님께 우리의 생각과 바라는 바를 아뢸 수 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
그런대 기도 문제를 생각할 때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기도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설득하고 강요하려는 자세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기도를 많이 본다. 하나님을 위협하듯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해서 어떤 기도제목이 이루어진 걸 놓고 자랑이나 되는 것처럼 떠벌리기도 한다. 예컨대 어떤 교회에 문제가 생겨 둘로 나뉘어졌다고 하자. 양측에서 서로 자신들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난처한 일이다. 이런 일들이 한국교회에서는 자주 일어난다. 사생결단 할 것처럼 소란스럽게 기도가 드려진다.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수단으로서 기도를 사용한다는 말이다.
기도는 기도를 드리는 자가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순종의 자세다. 하나님의 뜻이 무언지 모르니까 성령의 도움으로 그분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이루지는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신앙의 자세가 곧 기도다. 이런 자세를 갖는 사람은 그렇게 공격적으로 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기도를 드릴수록 점점 겸손하게 될 뿐이다. 자신의 무지를, 자신의 오만을 용서해 달라는 사죄를 구할 뿐이다.
만약 기도의 열심으로만 말한다면 세계 어떤 교회도 한국교회를 따라올 수 없다. 이런 열심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바르고 깨끗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기도를 드리는데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부정부패가 심한 국가로 남아 있다는 건 무얼 뜻하는 걸까?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수많은 반사회적 문제들, 부도덕한 사건들, 파렴치한 행위들은 우리에게 기도의 양과 열심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왜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왜 기도를 드리는가?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께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다. 자신의 프로그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프로그람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게 바로 기도행위다. 종교적인 경건성을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자신의 인간적인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기도를 드린다면 그런 건 아무리 열을 올려도 공허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기도는 바리새인처럼 군더더기나 중언부언으로 꾸미지 말고 정직하게 드려져야 한다. <199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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