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목사의 콩팥기증

지난주일 저녁 그간 가깝게 지내던 김 목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미리 말씀을 드려야할지 어떨지 잘 모르겠는데, 선배 목사님께만이라도 알리는 게 도리일 것 같아서 이렇게 전화를 드립니다. 이틀 후에 콩팥이식 수술을 받게 됐습니다. 저 스스로 생각해 봐도 광기인 것 같지만 남에게 떼어줄 수 있는 콩팥이 있다는 것만 해도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수술이 잘 끝날 수 있도록 기도나 해주십시오.”
그는 지난 1월초에 아무도 모르게 콩팥기증 신청을 해놓고 이젠 빼도 박도 못한 시점에 와서야 전화통에 대고 한마디 불쑥 내뱉었다. 헌혈조차 꺼리는 이 시대에 자기 콩팥을 기증하겠다는 김 목사의 전화를 받고 과연 김 목사답다는 말밖에는 아무 소리도 할 수 없었다.
평소에 김 목사와는 여러 면에서 가깝게 지냈다. 우선 같은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동지적 연대성에서 그랬다. 나이는 나보다 세살이 적고 따라서 신학교도 삼년 후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공동운명체적 감정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목사라는 것만 같고 그런 내적 친밀감을 느낀다는 건 아니다. 김 목사와는 신학과 철학에 대한 지성적 친교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특별한 애정이 간다. 그는 경북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를 마친 후, 이어 박사과정을 끝냈으며, 몇 년 전 부터 그 대학교에 시간강사로 나간다. 김 목사를 통해서 적지 않게 철학적 사색에 대한 방법론을 배웠다. 필자도 철학적 신학에 관심이 많은 터라 가끔 만나게 되면 비록 충분한 깊이에 까지 들어가진 못해도 어느 정도 세상, 역사, 시간, 존재와 인식, 사물 등에 대한 이해를 나눌 수 있었다. 주변에 학문적인 친교를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건 살아가는데 큰 즐거움인 것처럼 김 목사는 내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김 목사와의 만남이 즐거운 건 그 외에도 또 하나 있다. 둘 다 바둑을 즐긴다. 김 목사는 2급 정도고, 나는 4급 정도다. 처음에는 세 점 정도 깔고 두다가 이제는 거의 두점이로 치수가 확정됐다. 이 말을 들으면 김 목사는 아마 세 점에 맞다고 특유의 큰소리를 칠지 모르지만.
서로 나눌 수 있는 부분들이 많다고 해서 그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다른 점들도 적지 않다. 언젠가 내가 김 목사에게 직접 한 말이지만 그는 명분론자다. 무슨 일이든지 명분이 서지 않으면 하지 않고, 명분이 서면 앞뒤 가리지 않고 한다. 이번 콩팥기증도 역시 그의 이런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행위다. 자신이 육체적으로 당해야할 불이익이 아무리 커도 그래야할 명분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콩팥을 떼어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줄 수 있었다. 이에 반해 나는 비겁한 자유주의자다. 그럴듯한 명분보다는 자신의 자유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명분과 자유를 같은 틀(패라다임)에서 단순비교 할 수는 없지만, 굳이 하자면 명분론은 탈아(脫我)가 강한 반면, 자유론은 자기(自己)가 강하다. 따라서 그는 어떤 순간에 엄청난 파격을 서슴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까지 나서지 않는다.
이런 생각의 차이가 목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김 목사는 명분 있는 일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신자들의 교육적 목표를 위해서 내가 보기에는 아무 쓸데없는 일 같은 구태의연한 부흥회를 한다. 자신의 목회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명분에서 자신을 매우 피곤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그런 일들을 피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나는 내 자유의 영역이 허물어지는 그런 일들은 아무리 명분이 있어도 실행하지 않는다.
명분론자인 김 목사에게서 삶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부분은 구체적인 인간론, 혹은 현실적인 인간론에 있는 것 같다. 그에게 인간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이 땅 위에서 몸뚱이를 안고 살아가는, 특히 고통과 시련, 그리고 자기모순과 한계를 갖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투명한 의식에 상당히 거리가 있는 사람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다. 격의가 없다기보다는 그들과 하나가 돼서 살아간다.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인간이 바로 구체적인 인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도저히 그를 따라갈 수 없는 목회자적 탁월한 능력이다.
수술이 끝난 이틀 후, 지난 3월20일 병원을 찾았다. 내가 찾은 그 시간에 그는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기침을 해서 약간 쪼그라든 폐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뭔가를 먹어서 위장의 활동을 가능한 빨리 정상으로 움직이게 해야 한다는 의사의 충고가 있었지만 왠지 속이 더부룩해서 꼼짝 않고 누워 있다가 혹시나 해서 변기에 앉아보았지만 별로 효과가 없어 내려오고 말았다. 그를 보자 “살아있었네!”라는 시답잖은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만큼 초췌하지 않아서 좋았다. 간호장교 출신인 그의 아내가 흡사 남동생을 간호하듯 김 목사를 보살피고 있었다. 두 딸은 자기들 끼리 며칠 동안 좁은 사택에서 밥을 끓여먹고 지낸다고 했다. 한 마디 던졌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 무얼 생각했소?” 그의 입에서는 다음의 성구가 흘러나왔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목사님, 인간육체의 구원을 제외시킨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곳에 있는 동안 신유(神癒)의 의미를 몸으로 절실히 느꼈으면 합니다.” 그렇다. 그는 삶과 목회를 사유가 아니라 몸으로 맞서 투쟁하는 성결교회의 좋은 목사다. <1997.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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