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

사람은 평생을 살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내 기억에는 두 번쯤 그런 적이 있었다. 한번은 초등학교 5,6학년 때 저수지에서 동네 아이들 몇 명과 함께 썰매놀이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얼음이 얇은 곳으로 갔다가 빠졌는데, 몸은 얼음 밑으로 빠지고 팔을 벌려 겨우 얼음바닥에 매달려 있었다. 친구들이 조심스레 다가오더니 썰매꼬챙이를 내게 내밀어 그걸 의지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운이 나빴다면 나를 구해주려던 친구들마저 몸땅 얼음 속에 빠져 죽었을지 모른다. 다른 한번은 중학교 3학년 때 연탄가스를 심하게 맡은 적이 있다. 무의식중에 벽을 발길질로 찼던 것 같다. 그 소리를 듣고 형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업고 나가셨다. 그 당시는 연탄가스로 죽는 사람이 일 년에 수백 명씩 있었던 때였다. 이런 두 번의 경우 말고는 별로 이렇다 할 위험 없이 살아온 것 같다.
우리 주변에는 여러 이유로 인해서 죽음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특히 자동차로 인한 죽음은 지나치다 못해 저주스럽다. 보통 전국적으로 볼 때 일 년에 2만 명 가까이 죽는다고 한다. 죽는 사람 말고 불구가 되는 이들의 숫자를 합친다면 자동차야말로 우리 한국 사람들의 운명을 망치는 주범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우리 현풍 우회도로나 국도, 고속도로에서 많은 사고가 나서 여럿이 죽었다.
사실은 인간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토끼, 노루, 사슴, 그리고 소나무, 미루나무, 채송화, 방울꽃 등 모든 생명체가 죽는다.
그런대 인간은 자연과 달리 자신의 죽음을 실존적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개, 소 등은 그저 본능적으로 죽음과 연합해서 살아갈 뿐이지만 인간은 죽음을 현실적 삶과 연결시켜 살아간다는 말이다. 동물들은 동료의 죽음 앞에서 나름대로 슬픔을 느끼긴 하지만 그 죽음 자체를 의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가족과 동료의 죽음을 단순히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함에 대한 슬픈 감정으로만 받아들인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슬픔으로서만이 아니라 죽음 자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자신과의 실존적 연관성 속에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인간만이 장례문화를 갖는다. 장례는 단순히 죽은 자에 대한 예의만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살아있는 자의 실존적 참여라 할 수 있다. 상주들만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죽은 자를 생각하면서 죽음 자체를 생각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죽음도 의식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장례의식을 통해서 사람들은 삶에 대해 보다 진지한 자세를 갖게 된다.
인간의 특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항상 우리 곁에 맴돌고 있지만, 죽음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이다. 과학자들이 죽음에 대한 정의를 몇 가지로 설명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설명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의 죽음과 연결시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역사는 죽음과의 투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파멸인 죽음을 벗어나려고 절대 권력에 집착하거나 피라미드처럼 어마어마한 건축물에 매달렸다. 많은 자식을 통해서 혈통을 유지하거 위대한 예술작품을 생산해 보려했다. 군대를 일으켜 작은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제국을 만들기도 했다. 죽음을 거부해 보려는 이런 행위가 아무리 강해도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몸짓이 거칠면 거칠수록 무너지는 소리가 더 요란할 뿐이다.
그런대 오늘 현대인들은 아예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버렸다. 오늘처럼 기술문명이 고도로 발전하기 전에는 그래도 죽음을 실존의 바탕에 두고 살았지만 지금은 무한한 생산과 소비의 순환만이 존재의 바탕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죽음과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무리 살아있음을 강조한다고 해도 역시 인간은 죽음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 그저 잠시 잊고 있을 뿐이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죽음이 극복됐다고 믿는다.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를 하나님이 삼일 만에 다시 살리신 사건은 바로 모든 인류가 최후에 획득하게 될 죽은 자로부터의 보편적인 부활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승리가 바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이런 우리의 부활신앙은 무얼 뜻할까? 썩었던 몸이 다시 원상회복되는 걸 말하지는 않는다. 검은 피부는 검은 피부로, 시각장애는 그런 상태로 다시 산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두가 모델처럼 멋있는 육체를 갖고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부활이 생물학적인 면에서의 육체와 별로 상관이 없는 문제라면 정신적, 영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지만(창3:19),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됐기 때문에(창2:7) 영적인 존재로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원론적인 면에서 몸을 제외한 영혼이란 건 결코 성서적인 인간론이 아니다. 성서에서 영이라고 할 때 그건 몸 까지 포함시킨 의미다. 따라서 부활이라고 할 때 육과 대별되는 영만의 부활일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부활의 실체를 그림처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다. 이게 바로 인간과 지식의 잠정성이다. 다만 우리는 부활을 참된 생명의 세계라고 말할 수는 있다. 우리가 종말에 참여하게 될 생명의 세계, 그 시간이 바로 부활이다. 굳이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완전한 사랑의 세계다. <1997.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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