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法)

독일이라는 나라는 법만 잘 알면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우 다양한 법률들이 지배하는 사회다. 기본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거의 완벽하게 운영되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자기 자녀들이 장난치다가 남의 집 물건을 훼손했을 때 보상해주는 보험이 있을 정도니까 알만 하다. 독일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선진국일수록 변호사 숫자가 많은 이유도 역시 사회를 구성해 나가는 기준이 법에 있기 때문이다. 대쪽이라는 별명을 가진 여당 대표가 한보와 김현철 문제를 ‘법대로’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 대한민국도 언필칭 법치국가임에 틀림없다. 헌법을 중심으로 한 각종 법률, 시행령, 지방자치법, 도로교통법 등등 법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지금 우리 문명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법(法)이 언제 부터 시작됐는지 확실하게 알기는 힘들다. 쉽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람이 집단을 이루어 살다보니까 어떤 질서가 필요하게 됐고, 그런 질서가 관습이나 전통, 혹은 불문율로 지켜지다가, 군주국가로 확장되면서 보다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법제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고대시절이야 단순히 이웃과 이웃 사이에서 벌어지는 손해배상 따위를 원로나 촌장이 중간에서 적당하게 해결해주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군주가 생기고 각종 사회시설, 각종 이해집단들이 생기면서 이를 중재할 복잡한 법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법은 함무라비 법전이라고 하는데, 그 법전의 기본정신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고 한다. 이런 고대법전이 발전하면서 유명한 로마법이 만들어지게 됐고, 그 후 2천년 정도의 세월이 흐르면서 현대법이 완성된다.
인류가 법을 만든 이유는 분명하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런대 사회질서는 약자의 권리를 보장하는데서 유지되기 때문에 결국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다. 강자는 이런 법적 조치가 없어도 얼마든지 생존해 나갈 수 있고, 어떻게 보면 무법할수록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에는 좋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두 사람이 치고받으면서 싸웠다고 하자. 힘이 부친 사람이 얻어터질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힘이 강한 사람이 기회만 있으면 약한 사람을 두드려 팬다. 이때 법이 중간에 들어서서 폭력을 휘두른 강한 자를 구속해서 일정한 처벌을 내리게 된다면 약자가 더 이상 불이익을 당하지 않게 된다.
이런 정신에서 출발한 법이 과연 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면 그렇게 분명하지가 않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힘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법이 오히려 강한 자의 입장에서 변질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갖게 된다. 단적인 예로 최근에 한보사태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바지만, 국회의원들이 아무리 많은 돈을 기업가로 부터 받는다 하더라도 대가성이 아니라는 것만 인정된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 그게 우리의 여야의원들이 만든 정치자금법이다. 그래서 지금 한보와 관련돼서 소환 받았거나 대기 중에 있는 많은 정치인들이 자기가 받은 돈이 청탁이나 특혜와 관계없다는 걸 강변하는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평범한 시민들로서 우리는 누가 정당한지 누가 불의한지 판단할 수 없다. 다만 법적인 정당성과 부당성의 차이가 별로 없다는 것, 혹은 무의미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거의 모두가 돈을 받았는데 그 시기의 차이에 따라서, 혹은 대가성의 유무에 따라서 구속되거나 무혐의 처리된다는 것이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법적용의 미묘한 차이점 보다는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할 것 같다. 과연 법이 진정으로 인간사회를 정의롭게 하는가, 신학적으로 말해서 법이 인간을 구원하는가, 라는 관점이다.
법이 지배하는 사회는 최소한 외형적으로 어떤 질서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특히 오늘과 같은 다원화 된 사회에서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천 년 동안 인류가 법을 발전시켜왔고 지금도 그 법을 다루는 법조인들이 이 사회의 최고위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법 만능적 사회는 인간구원이라는 점에서는 참으로 무능력하며, 오히려 구원으로 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데 훨씬 더 강력한 능력을 발휘할 뿐이다. 왜냐하면 법실증주의는 근본 법정신이 아니라 형식적 법조문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실정법 보다 오히려 상위개념이어야 할 양심이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사회는 법에만 저촉되지 않으면 모든 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대기업 사주들이 법망을 피해가면서 자식들에게 엄청난 재산을 증여하고, 주식시장을 주무르면서 불로소득을 챙기고, 교묘하게 노동자들을 해고하며, 벌금을 물 망정 노동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장애자 고용을 거부하며, 폐수를 방류한다. 그래도 양심적으로 부끄러울 게 하나도 없다.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외형적 법조문만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지 정의사회구현, 약자보호라는 법의 정신을 이미 포기해 버렸다는 점에서 이 사회는 구원과 관계없다.
신약의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법조문(율법)에 충실했지만 예수님에 의해 질책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신앙을 율법준수라고 본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이 내포하고 있는 기본정신의 실천에 있다고 보았다. “안식일(율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법지상주의가 지배하는 오늘 우리 사회와 모든 문명사회가 받아들여야 할 변함없는 진리다. <1997.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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