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

미국의 저명한 윤리신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가 1932년에 출판한 <도덕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Moral Man and Immoral Society)는 윤리신학계에서 일종의 고전이 됐다. 현실주의적 윤리관을 갖고 있는 그가 그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이라 하더라도 사회 체제 안에 들어가게 되면 부도덕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개체로서의 한 인간이 자기가 혹해 있는 사회구조를 초월해서 행동하는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가족에 대한 애정이 풍부한 사람이 간혹 사회적 활동에서는 비정한 행위를 서슴지 않는 것과 같다. 히틀러 시대에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내는데 앞장섰던 많은 고급장교들이 가정과 자기 직장에서 보여준 이중성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장본인들이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르게 개인적으로 비인간적이거나 정신파산선고를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아주 평범한, 어떻게 보면 오히려 지성과 교양을 갖춘 그들이었지만 그 당시 히틀러 체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잔인한 행위에 감당하게 됐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미국의 노예제도다.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상인으로 부터 사들인 모든 백인들이 부도덕하거나 비양심적인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당시 그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윤리기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신앙고백하면서도 흑인을 노예로 다루었던 것이다. 이런 삶의 태도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국이나 독일, 일본의 다국적 기업들이 파키스탄이나 인도,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부당한 노동행위를 저지르고 있지만 양심적으로 거리끼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 나라를 위한 애국심쯤으로 여길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어떤 개인의 범죄행위에 대해 단순히 그 사람에게서만 원인을 찾아서는 충분하지 않고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밝혀나가야만 한다. 개인 보다는 사회의 윤리성, 사회의 구원이 근본이라는 말이다.
요즘 우리 사회를 뿌리로 부터 뒤흔들고 있는 ‘한보사태’만 해도 그렇다. 국회청문회에 나온 증인들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너무 거짓말을 뻔뻔스럽게 한다고 비판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들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해 고해성사 하듯 말해주기를 기대했다면 그건 지나친 감상적 발상에 불과하다. 그들은 가능한대로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그 정당성 내지 불가피성을 피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선이며 당위다. 그들이 현재 거짓말을 하든 그렇지 않든 대충 그들 행위의 전모가 드러났지만, 그런 행위가 반드시 그들의 특별한 부도덕성에 기인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주시해야 한다. 은행장의 예를 들어보자. 한보로 부터 2,3억 원의 뇌물을 받고 특혜대출을 해준 그들의 행위는 당연히 불법이라고 할 만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대개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죄의식을 갖고 그렇게 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한보 측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처음부터 나라를 말아먹을 생각으로 그런 철강 사업을 벌였을까? 그렇지는 않다. 현실성이 있든 없던 간에, 그리고 그들의 기업윤리에 문제가 있든 없던 간에, 포항제철에 버금가는 철강회사를 만들어서 개인의 명성도 떨치고 국가발전에도 이바지 하겠다는 나름대로의 의욕이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국회의원, 금융계, 지방자치단체장, 직간접으로 자신들의 사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들에게 보험에 든다는 심정으로 돈을 뿌렸다. 따지고 보면 심하게 한 게 문제였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사업하지 않는 이들이 어디 있는가? 크고 작은 기업가 치고 한보의 총회장 정태수씨를 손가락질 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불법성과 거짓말에 흥분하고 있는 우리 일반 국민들도 역시 이런 범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물론 모든 범죄행위를 사회구조적 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게 하다가는 죄를 추상적으로만 규정하게 될 우려가 있다. 아무리 사회적 가치기준이 혼란스럽다 하더라도 책임적 존재로서 각기 개인들이 윤리적 판단을 분명하게 해야 하며, 또한 상당한 부분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어떤 코미디 프로그람에서 운전자들의 심야 교통신호 준수 여부를 ‘몰래 카메라’로 잡았던 적이 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붉은 신호가 켜졌는데도 통과해 버렸지만, 한 장애자부부만이 끝까지 신호를 지켰다고 해서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이런 일들은 그 개인의 습관적, 혹은 의지적 도덕성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윤리적 책임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건 매우 중요하다.
결국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건 개인의 책임감과 사회구조적 제도다. 어떤 사회적 비리가 터졌을 때 마다 많은 이들이 분노하고 당사자들을 매도하고 있지만 그건 문제의 본질을 올바르게 꿰뚫어보지 못한 까닭이며, 또한 그들을 몇 명 사법처리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한 개인이 사회구조 내지 정서 가운데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파악해서 가능한대로 그런 불의와 차단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가야 한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한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그녀를 향한 연민이나 긍휼만을 뜻하는 말씀은 아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결벽을 확인하려는 위선에 대한 경고다. 오늘 우리는 한보관련자들에게 돌을 들 만한 자격이 있을까? <1997.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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