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박정희 전 대통령인가?

몇 달 전 영국에서 복제양 돌리가 출현했을 때 고려대학교 신문사에서 우리나라 인물 중에서 복제하고 싶은 인물이 누군가에 대한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백범 김구와 테레사 수녀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지를 받은 인물이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후 79년 당시 김재규 정보부장에 의해 시해당할 때 까지 18년 동안 철권정치를 휘두르며 이 나라를 어둡고 추운 겨울공화국으로 만들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고 한다. 작년 공보처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세종대왕(18.8%)과 이순신장군(14.1%), 백범 김구선생(10%)를 제치고 박정희 전 대통령(23.1%)이 1위를 차지했다. 그러니 대통령의 직무수행능력만 평가한 최근 일간신물의 설문조사는 보나 마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75.9%로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이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이 나라의 지성인이라 할 대학생들이나 일반 대중이나 모두 한결같이 어떤 이유에선지 세계적인 차원에서 독재자로 악명이 높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의 실체를 알고 그러는 건지 아니면 현재의 무력감에서 나온 일종의 향수병인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이런 현실이 확고하다는 점이다. 지도력이 상실된 이 시대정신이 독재자라도 괜찮으니까 그런 카리스마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류에 편승해서 중앙일보에 박정희의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 씨가 회고록을 연재하고 있으며, 대구매일신문에는 정영진 씨가 소설형식을 빌려 박정희에 대한 실록을 연재하고 있다. 지난달에 소설가이며 이화여대교수인 이인화씨(31살)가 인간 박정희를 재조명한 소설 <인간의 길>을 발표했다. <태백산맥>의 작가이며 포항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을 박태준 씨에게 강권했다는 조정래 씨도 그런 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하니 기가 막히다. 말 그대로 요즘 우리 사회는 박정희신드롬에 싸여 있는 셈이다.
왜 박정희 전 대통령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재평가 내지 미화하려는 이들의 강조점은 그의 민족적 애국심과 경제개발업적을 든다. 그가 동서냉전 시대에 나름대로 민족적 자주성을 확보하려고 한 모습이 있긴 하지만 그게 진정한 민족적 주체성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한 정치적 제스처였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정확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하겠다. 사실은 일제 말기에 일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활동하던 그가,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서 용감히 싸우며 6,70년대 한국 지성계를 이끌었던 ‘사상계’의 장준하 씨는 일본군대에서 목숨을 걸고 탈영했다- 과연 얼마나 민족적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길이 없다.
어쨌든지 6.25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던 이 나라를 지금 이 정도로 살만한 나라가 되도록 초석을 놓은 인물이 바로 그라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다. 물론 박정희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는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그가 추진한 경제개발 프로젝트로 인해, 결과론적으로 볼 때 한강의 기적이라 부를 정도의 경제발전을 이룬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독재행위가 용서되는 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잔인한 철권정치로 인한 국민적 상처가 그의 경제적 업적을 송두리째 뽑아낼 만하다. 6,70년대는 그야말로 살벌했다. 툭하면 대통령의 긴급조치가 내렸다. 1972년에는 사이비 헌법학자들을 압박해서 대통령의 초자연적 권한을 보장한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사실적으로 3분의 2를 자신이 임명하다시피 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장충체육관에서 거의 100%의 찬성으로 대통령이 되는 길을 굳혀놓았다. 다방이나 빵집에서 시사적인 말을 할 때 항상 주위를 둘러보아야 했다. 만약 반정부적인 발언을 함부로 하다가 정보계통에 들어가기만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남산으로 끌려가서 만신창이 되도록 린치를 당했다. 교사들도 학생들에게 말조심을 해야만 했다. 행여 반정부적인 발언을 들은 학생들이 자기 부모에게 그 말을 전해서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로 봉산교회 신자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대통령이 시골출신이라는 말을 약간 빈정대듯이 하다가 결국 철창신세를 면치 못하는 걸 봤다. 국가원수 모독죄라나? 교회 학생들을 데리고 수양회를 가더라도 근처 경찰서가 파출소에 신고를 해야만 했다. 대개의 교회에는 형사들이 고정 배치돼서 목사의 설교나 각종 모임을 사찰했다. 정부를 비판했다고 해서 많은 종교인들과 대학교수들이 감옥에 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다스리던 시대는 죠지 오웰이 쓴 <1984년>과 같았다. 빅 브라더가 모든 백성을 감시하는, 문제가 되는 사람은 비밀 기지로 끌고 가서 굶은 쥐로 고문해 대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떤 사람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정치와 경제업적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경제발전만 시킨다면 히틀러 같은 미치광이가 정치를 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사실 경제발전, 경제발전 하지만 그런 독재정치가 허용되기만 한다면 지금도 그런 정도의 경제발전이 가능하다. 총과 칼로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어놓고 수출에 열을 올릴 수만 있다면 누가 돈을 벌지 못하겠는가? 더구나 그 당시의 과도한 경제성장제일주의가 지금 총체적 부실국가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의 경제적 업적도 하찮은 것이다.
박정희 열풍이 분다는 건 어떤 세력의 의도적 음모이며, 그것에 놀아나는 민중의 탈 역사적 허무주의다. <1997.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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