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들의 대화

목사들 끼리 초면인 경우에 대개는 일단 수인사를 나누며 통성명을 한다. 자기 이름과 시무하고 있는 교회 이름을 댄다. 그리고는 곧 몇 명이나 모이나요? 일 년 예산은 얼마나 되나요? 큰 교회이거나, 급성장하는 교회라면 자랑할 말이 많을 거고, 작은 교회라면 별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자랑할 게 많은 교회의 목사는 당연히 목에 힘을 주고 자신의 목회능력을 장광설화로 늘어놓는다.
같은 지방회에 속한 가까운 목사들이 지방회 가까운 기간에 모이면 교회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번 지방회에서는 누구를 부회장으로 밀어야겠다거나 다른 쪽과의 표 대결에서 이기려면 어느 쪽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말들을 신이 나서 한다. 총회 차원에서는 훨씬 강한 정치적인 헤게모니 쟁탈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평상시에 만나면 교회성장 방법론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풀기에 정신이 없다. 어떤 교회 목사는 하루에 기도를 여덟 시간이나 한다거나, 이번 여름 목사 초청 부흥회에 갔더니 개척 십년 만에 만 명 교인을 모은 목사가 강사로 나와 목사들의 사명감에 대해 열강을 했다는 이야기 같은 내용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아주 가까운 신학대학 동기들이 모이게 되면 좀더 비밀스런 말들을 하기도 한다. 자기 교회 신자 중의 한 사람이 얼마나 말썽을 피우는지 힘들어 죽겠다거나, 교회당을 신축하는데 어떤 목사를 모셔다가 부흥회를 했더니 헌금이 넉넉하게 나왔다는 이야기로 부터 자기 가족 이야기, 먹는 이야기, 혹은 신자를 다루는 기술 등에 대해서도 말들을 한다. 모임의 시간이 넉넉하면 그러다가 볼링을 치거나 고돌이를 하고, 아니면 노래방에 가기도 하고 영화감상을 하며, 사우나에 갔다가 함께 잔다. 모든 경우가 똑같지는 않지만 대개는 그렇다.
목사들이 모여 그런 말을 하며 지낸다는 건 하등 이상하지 않다. 자신들의 세계가 그런 것이니까 자기들 끼리 통하는 그런 주제로 말을 하고 그런 놀이를 하며 지내기 마련이다. 평소에 아무에게나 할 수 없었던 그런 말들을 목사들끼리만 만났을 때 하게 되는 건 당연하고, 또한 그게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모임에 참여하기가 싫다. 친구, 선후배 목사들을 만나는 건 좋지만 막상 만나서 그런 말만 하고 그런 놀이만 하고 나면 얼마나 허전한지 모른다. 너무나 뻔한 말이 분주하게 오갈 뿐 마음에 와 닿는 부분들이 별로 없다. 그럴 바에야 집에서 책이나 보던지 번역하든지, 아니면 동네에서 테니스 회원들과 운동을 하는 게 그래도 낫다고 까지 생각이 든다. 참으로 안타깝다. 내 성격이 별나서 그런가?
목사라고 해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산신령처럼 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목사들끼리의 만남과 그 대화는 무언가 다른 게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게 뭘까? 목사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언가를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그건 구원문제다. 목사들의 존재와 행위는 바로 인간구원으로 부터 시작해서 그것을 향할 수밖에 없다. 구원문제는 곧 목사의 존재론이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만나면 시에 대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만나면 그림에 대해,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만나면 정치에 대해,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사업에 대해 말을 하는 것처럼, 목사들의 대화는 구원으로 모아져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목사들이 만났을 때 구원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목사들이 자신들의 일에 대한 정열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일에 대한 너무나 확연한 대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걸 잘 알고 있는 마당에 더 이상 그런 걸 주제로 말할 필요는 전혀 없다. 교회를 확장하고 조직을 강화하고 가능한대로 국내외 선교에 박차를 가하는 일, 신자들이 내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살게 하는 일이 바로 구원이다. 지난 2천년 동안 교회의 역사가 구성해 놓은 구원형식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만 따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굳이 그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아무리 인생경험이 많고 학문을 깊이 연구했어도 인생의 비밀을 완전하게 알 수 없듯이 아무리 신앙경험이 풍부하고 성경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구원의 신비를 완전하게 알 수는 없다. 이런 절실한 문제를 이미 완료된 것으로 전제하고 살다보니 겉으로는 많이 말을 하지만 실제로는 무관심하게 된다. 대신 교회관리에 대한 노하우에 관심을 집중시키게 된다.
이 문제는 단순히 대화의 주제에만 한정되지 않고 목사의 전반적인 삶의 태도와 연관된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건이나 주변 환경을 이미 주어진, 고정된 틀(패러다임)로만 이해하려고 하지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보려 하지 않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고민도, 사색도, 치열한 몸부림도 없다. 다만 성취감만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추동력이 된다.
늘 갖는 질문이지만, 과연 목사의 세계가 시인의 그것 보다 넓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신앙과 구원문제를 삶 자체로 이해하고 해석해 내려는 구도자적 진지성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예술가들 보다 앞서 있지 못하다. 종교적 수사학에 숨어서 인간구원, 세계구원을 말할 수는 없다.
언어는 그 사람의 존재론이다. 그가 터하고 있는 깊이만큼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인간구원을 설파하는 목사가 그만큼의 존재론적 깊이를 갖고 있는지 그들의 대화에서 알 수 있다. 미사여구가 아니라 삶이 녹아있는 그런 구원론적 대화 말이다. <199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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