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주의 극복하기

문명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적으로는 기술의 발전이 그것이다. 문명의 주인인 인간은 기술을 통해서 자연을 이용하게 된다. 쉬운 예로 농사를 짓는다거나 강에 댐을 건설해서 전기를 얻는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중국의 만리장성과 이집트의 피라미드 같은 건축토목공사도 인간기술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그러나 문명은 그런 기술적인 부분 말고도 정치, 교육, 종교 같은 사회적 질서라는 특징을 갖는다. 문명이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성격을 갖기 때문인 것 같다. 잘 알려진 대로 메소포타미아, 황하, 이집트, 잉카 등 고대 문명발생지는 거의 이런 특징들을 갖는다.
문명사회는 또 하나의 독특한 특징을 갖고 있다. 도덕, 혹은 윤리다. 한 집단이나 체제를 내적으로 통일시키는 질서 중의 하나가 바로 도덕이다. 이런 도덕은 하루 이틀에 완성되는 게 아니라 수십, 수백 년에 걸친 문명사회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행위의 기준틀로 작용하면서 완성된다. 예컨대 충효사상이나 삼강오륜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런 도덕률은 그 집단에 내재화 되어서 행위를 규정하는 진리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도덕률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은 이단자로 추방될 수밖에 없다.
문명이 만들어낸 이런 도덕적 규범들은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는다. 그 사회를 도덕적으로 지탱해주는 지주역할을 감당한다. 일종의 절대이념으로서 집단의 내적 일체감의 기초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부분에서 비인간적인 강제규정으로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의 시대적, 사회적 한계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어 칠거지악이라는 우리의 옛 도덕률은 그 시대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가치관이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는 비인간적이다.
어쨌든지 도덕적 가치를 절대이념으로 간주하고 사람들의 행위를 규정해 나가는 걸 도덕주의라고 한다. 이런 도덕주의 앞에서는 그 어떤 상황론도 용납되지 않고 도덕규범에 얼마나 충실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만 기준이 된다.
이런 도덕주의를 기독교적으로 말한다면 율법주의라 할 수 있다. 예수님과 논쟁을 많이 벌였던 바리새인들은 전형적인 율법주의자이며 도덕주의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율법적이지 않은 사람,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면서 오직 율법에만 충실해보려 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오직 한 가지 규범으로만 재단했다. 안식일을 지켰는가, 성결법전을 지켰는가, 하는 것만이 저들의 관심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예수님과 그 일행은 죄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먹고 마시는 일을 탐했다. 사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절대적으로 생각하던 율법을 상대화한 일이 많았다. 안식일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율법 폐기론자는 아니었다. 예수님에게 율법의 완성은 사랑에 있었다. 사랑의 행위를 위해서 율법이 필요한 것이지 율법을 위해서 사랑해야하는 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사랑에 충실하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적 시비를 무시했다.
이런 걸 놓고 볼 때 바리새인과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는 목표를 같이 했지만 그 과정에서는 엄청나게 달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굳이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지상주의였고, 예수님은 사랑지상주의였다. 삶에 대한 이런 두 태도는 결코 일치될 수 없다. 무슨 문제건 간에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복음서에서 보는 그대로다.
율법주의의 문제는 무언가? 율법 자체는 하나님의 법으로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하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다. 유대인의 율법이 이 세상에 정의로운 질서를 만드는데 상당한 역할을 감당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절대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게 문제였다. 율법이 요구하는 더 높은 가치를 무시하고 율법 자체가 진리가 되어 버린 사회의 특징이 바로 율법주의라는 말이다.
오늘 우리 사회는 도덕주의와 무도덕주의가 혼란스럽게 뒤얽혀 있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이 배우고 들은, 그리고 경험한 알량한 도덕으로 모든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그들의 눈에 비친 청소년들의 실험정신은 철없는 치기에 불과하다. 이문열 씨의 소설 <선택>이 말하는 것처럼 페미니스트들은 이 세상의 가부장적 질서, 남자와 여자의 고유한 기능으로서의 가치를 멋대로 뒤바꿔버린 문제아들로 간주된다. 도덕주의자들은 이 사회를 단단하게 붙들어 주는 도덕률만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반면에 무도덕주의라는 흐름도 있다. 기존 질서에 대한 일종의 무조건적 반대다. 가요계에서는 서태지로 대표되는 랩싱어들이며, 대학사회에서는 주사파, 문학으로서는 마광수 류의 사상들이다. 이들은 기성의 모든 체제를 무시하고 소종파적, 혹은 열광주의적 열정으로 반항한다. 이들에게는 도덕주의만이 아니라 도덕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떤 고정된 틀이 절대적 힘으로 작동하는 도덕주의적 사회는 인간의 모든 자연스런 요구들을 부정한 것으로 매도해 버림으로써 인간을 변화되지 않는 질서에만 묶어두려고 한다. 반면에 도덕 자체를 폐기해버리는 사회는 사회를 통합해 주는 도덕적 가치를 무시해버림으로써 한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지만 동시에 자기파멸 및 무책임한 사회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후자 보다는 전자가 더 문제다. 우리 국민들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실망하는 이유도 역시 이런 도덕주의적 잣대만을 들이밀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말이다. <1997.6.8.>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