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본질

본질적으로 악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변은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에 대해 좋은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사람이 경우에 따라 실수를 할 수는 있어도 본질적으로 악하지는 않다고 생각할 것이며, 나쁜 경험을 많이 한 사람은 사람이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문제인데, 이런 두 관점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경험하며 살아간다. 의도적으로 악하게 행동하는 이들을 볼 때 인간의 본질적인 죄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과거 인간역사에서 저질러졌던 반인륜적인 행위들, 예컨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집단이 저지른 600만명의 유대인 학살이나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해서 저지른 야만행위만이 아니라, 요즘 일상사에서도 우리는 그런 일들을 다반사로 만나게 된다.
얼마전 일본에서는 초등학생이 잔인하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아이를 죽여 목을 자른 다음에 입속에 범행동기를 쓴 쪽지를 집어넣었는데, 이를 본 일부에서는 일본에 적개심을 품은 재일한국인일지 모른다는 말들을 했다. 그러나 범인은 놀랍게도 14세의 일본 중학생이었다. 학교와 경쟁, 공부의 억압 속에서 황폐해진 어린 소년의 끔찍한 범행이었다. 지난 6월29일 벌어진 타이슨과 홀리필드와의 헤비급 권투 타이틀 매치에서 타이슨이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는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 3회전이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마우스피스를 빼놓고 시합에 들어선 타이슨은 상대선수의 귀를 두 번이나 물어뜯었다. 클린치된 상태에서 투견처럼 상대의 귀를 물어뜯고, 그 살점을 내뱉던 그의 얼굴표정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우리는 주변에서 크고 작은 인간의 마성, 죄성을 만나게 된다. 의도적으로 남의 돈을 빌려서 갚지 않는다거나, 은행돈을 빌려 사업을 하다가 적당하게 자신의 몫을 챙긴 다음에 부도를 내기도 하고, 인신매매, 성폭력, 살인, 강도, 공갈, 사기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악의 현상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드러난 모든 범법을 그대로 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많은 경우에 그것은 그것을 실행한 개인 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환경이 더 심각하게 문제이기도 하다. 만약 사회적응을 하지 못해 힘들어하던 어떤 사람이 굶주리고 있는 자식을 위해 식료품 가게에 들어가 빵과 음료수를 훔쳤다면 일단 범법자이긴 하지만 그를 죄인이라고 단죄해 버릴 수만은 없다. 그로 하여금 최소한의 생존을 가능하게 만들지 못한 사회적 책임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에릭 프롬은 상하권으로 된 <인간은 파괴적인 동물인가?>라는 책에서 인간의 파괴성은 문명과 정비례한다는 결론을 추려냈다. 문명과 거리가 있었던 고대인들이 오히려 평화로웠던 반면에 문명인일수록 훨씬 파괴적으로 행동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악과 죄는 그걸 가능하게 하는 어떤 문명적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환경과 구조 안에서 인간은 본래적 성품 보다 훨씬 악한 쪽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동물과 비교해서 설명할 수도 있다. 보통 야수라고 불리는 동물들이 다른 짐승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파괴적인 것 같지만 그들의 행위는 인간의 죄와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한다. 동물들의 공격성은 대개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생존을 위한 것이다. 사자나 호랑이, 늑대 등은 암놈을 차지하거나 허기가 졌을 때만 싸운다. 일단 그런 일이 처리되고 난 다음에는 코앞에 토끼가 지나가도 잡아먹지 않는다. 자연에 가까운 동물들의 이런 행동동기를 볼 때 인간의 악이란 것도 원래적인 것이기 보다는 환경적인 성격이 강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성서는 이에 대해 약간 다른 입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악과 설화에서 보는 대로 인간은 원죄에 묶여 있다. 카인설화도 역시 그런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카인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가 결국 살인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아무리 환경이 열악하다고 해도 모두가 악에 휩쓸리지 않는다고 할 때 인간에게는 환경에 상관없이 악을 행할 수밖에 없는 본래적 죄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결정적인 답변을 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영원히 주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일단 악의 본래적 성격과 비본래적 성격을 둘 다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본래적인 것이야 우리 인간의 힘으로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지만 비본래적인 부분만은 최선으로 고쳐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의 악에 들어있는 비본래적인 부분을 결정하는 환경적인 조건은 현대문명의 경쟁구조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바로 인간구원의 길이기도 한데, 이를 성서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사랑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카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유는 하나님이 동생의 제사만 받으시고 자기 제사는 받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미 그때부터 경쟁구조 가운데서 악이 싹트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구조는 이런 경쟁심을 그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하다. 이런 구조 가운데서는 아무리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마음의 평화를 가질 수 없다. 미움의 윤리에 기초한 사회는 만족이 없는 법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데 이기고 지는 차이가 별로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럴 때 비록 인간에게 악의 본질이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악에게 숙명적으로 묶이지는 않을 것이다. <199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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