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이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

초대교회로 부터 중세기,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 까지 적지 않은 신학자들이 구약을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시킬 것을 주장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는 1900년 어간에 베를린대학 신학과에서 교회사가로 명성을 떨쳤던 하르낙이 대표적이다. 유대인의 시오니즘에 근거해서 기록된 그들의 역사인 구약을 비유대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더욱 결정적인 요인으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유대인의 경전인 구약을 기독교인이 믿는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비판했으며 급기야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로마법정에 고소해서 결국 죽게 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메시야로 믿는다. 이게 참으로 모순된 일이 아닌가? 유대인이나 우리 기독교인 모두 같은 구약성경을 두고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작업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리가 구약을 읽다가 당혹스러운 문제점들을 적지 않게 만나게 된다. 특히 유대인들의 배타성은 유달리 강렬해서 비유대인인 우리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이 많다는 말이다. 예컨대 여호수아가 출애굽 백성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아이성(城)을 공격하는 장면에서 그런 배타성이 극에 달하고 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아이성에 있는 모든 생명을 멸하라고 명하신다. 만약 이 명령을 어기게 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아무리 아이성이 이방인들의 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곳에서 전투하는 군인들만이 아니라 일반인에 이르기 까지 남녀노소 모든 사람을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참으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냉정하게 구약성서를 읽게 되면 구약성경이 지나치게 유대인을 싸고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방인들은 거의 안중에도 없다는 듯 유대인들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다. 하나님의 비호를 받은 유대인들은 때로는 정당하게, 때로는 부당하게 주변 백성들과 투쟁하고 그들을 정복해 나간다. 가장 전형적인, 그리고 핵심적인 투쟁은 가나안 영토 분쟁이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이후에 유대인들은 수천 년 동안 가나안 원주민들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했으며, 그 싸움은 사실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과연 가나안 팔레스틴 땅의 소유주는 누군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인가, 아니면 이미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인가? 이 판결을 내릴만한 사람이나 국가는 이 세상에 없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근거해서 그 땅이 자신들의 소유라고 하며, 원주민들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 2천년 동안 그곳에서 뿌리내리고 살았던 자신들의 지배권을 주장한다. 이런 토지분쟁이 구약성서의 역사적 배경을 이루는 근거며, 유대인들이 주변 민족들과 배타적 관계를 갖게 된 이유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면 일단 그 안에 들어있는 이런 유대인들의 배타성, 그들의 호전성, 그들의 시오니즘 등을 신학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단순히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세계사를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위해서 구약성서가 기록된 그 당시의 정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3천5백년 쯤 전, 그 당시의 근동지방은, 대개 고대사회가 그렇지만, 종족의 생존이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 개인과 사회, 혹은 국가윤리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했다. 예를 들어 그 당시는 일부다처제가 아주 일반적 가족형태였는데, 그건 그런 제도를 통해서만 그 종족의 생존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계속된 전쟁이나 수렵, 혹은 그와 유사한 위험한 일을 수행하다가 많이 죽게 되니까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를 아내로 삼아야만 후손을 번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두 명의 여자를 두었으며, 야곱도 네 명의 여자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요즘의 사회윤리에 의하면 이런 이들이 행위가 죄지만 종족의 생존이 우선되던 구약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다. 특히 종족이나 부족 사이에는 어떤 윤리적 관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던 시대였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자신들의 종족이 이 땅 위에 생존하는 것이야말로 최우선적 관심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들의 윤리였다. 따라서 매우 다른 시대에 사는 우리는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면서 저지른 야만적 행위를 우리의 윤리적 잣대로 판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한대로 그 당시는 다른 종족을 향한 야만적 행위가 일반적으로 자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유대인들이 저지른 야만성을 탓하거나 비호할 필요는 없다. 그 당시의 그런 생존투쟁의 조건 가운데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을 인도하셨으며, 그들은 어떻게 하나님에게 반응했는가, 하는 점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할 때 구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구약성서에는 우리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유대의 족장들, 그리고 사사들과 많은 왕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던 여러 예언자들을 만나게 된다.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 훨씬 선량하다거나 모범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선택한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야말로 생존의 절대조건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됐다. 이런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신뢰를 우리가 구약에서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이 바로 비유대인인 우리에게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96.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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