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인간의 특징은 바로 문화적이라는 데 있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비슷하게 자연적인 존재로 태어나지만 곧 주변을 현형시켜 나가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게 선천적인 건지 아니면 교육에 의한 건지 주장이 분분할 수 있지만 다른 동물들에 비해 이런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은 부인될 수 없다. 자연을 분명한 목표 아래 변화시켜나갈 뿐만 아니라 그 변화를 축적시키는 인간의 문화적 능력은 다른 동물이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능력이다. 예컨대 어떤 독수리들은 멋진 기술로 해변 절벽에 보금자리를 튼다. 그런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기술이 축적되어 발전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불개미들이 만드는 수 미터짜리 개미집도 신기하기는 매한가진데 발전이 없다. 아마 수억 년 전의 개미나 오늘의 개미나 자신들의 집을 짓는 데는 똑같은 방법을 쓰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은 집을 짓는 기술을 비롯해서 다리건설, 자동차, 비행기 등 모든 분야에서 놀랍도록 빠르게 기술을 발전, 축적시켜 나가고 있다. 이런 인간의 문화적 능력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다.
과연 이런 인간의 문화와 복음의 관계는 무엇일까? 깊은 관계가 있는지, 아니면 아예 상관이 없는지!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말하는데, 그게 인간의 문화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한쪽에서는, 교회는 이 세상의 문화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인간이 문화적인 것처럼 복음도 역시 문화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떤 관계일까?
미국의 저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인 헬무트 리챠드 니이버(1894-1963)가 쓴 <그리스도와 문화>라는 책은 기독교 윤리분야에서 고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지난 2천년 동안의 기독교 역사를 탐색하면서 기독교가 세상문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처해왔는가 하는 점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설명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는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유형이다. 기독교인이 어떤 세상환경에서 어떤 문화적 형태 속에서 살든지 상관없이 무조건 문화를 배척하려는 입장을 가리킨다. 인간문화는 본래적으로 악한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런 문화로 부터 자신을 구별 짓는 일이야말로 가장 신앙적인 행동이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문화와 그리스도의 사이의 일치를 주장하는 입장이 있다. 그리스도는 문화의 아들이고 문화 가운데서 살았기 때문에 오늘의 교회도 역시 복음을 문화적으로 전달해야할 사명이 있다고 한다. 세상은 본래적으로 악한 것이 아니고 교육과 계몽에 따라 얼마든지 선하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문화사상사에 위대한 영웅으로 인식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들은 철저하게 세상의 문화에 적응하는 교회를 주창한다.
셋째는 문화와 그리스도를 비약적 관계로 설명하는 유형이 있다. 문화와 그리스도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가 문화를 초월하는 비약의 부분을 갖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세상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동시에 신앙의 고유한 영역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는 문화와 그리스도를 역설적 관계로 설명하는 유형이다. 기독교인이 어쩔 수 없이 문화 속에서 살아가야하지만 그의 중심에는 세속문화가 언급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놓아두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마틴 루터의 입장이기도 한 이 견해에 따르면 이 세상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질서를 갖고 있기 때문에 교회가 간섭할 수 없게 된다. 즉 이원론적인 관계다.
다섯째는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혁자로 생각하는 입장이다. 칼빈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세상을 악하다고 보면서, 그렇다고 첫 번 유형처럼 세상을 등지거나 불신하지 않으며, 또한 네 번째 유형처럼 세상의 질서를 수수방관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변혁을 목표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는 주로 첫 번째나 네 번째 입장을 견지해왔다.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라는 복음찬송가의 가사에 있는 것처럼 세상문화를 멀리하는 것이 신앙의 척도인 것처럼 생각했고, 또는 세상의 권력이 아무리 불의해도 그것에 깊숙이 참여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을 신앙과 별로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겉으로는 세상에 관심이 없는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도 속으로는 대단히 세상과 그 문화를 부러워해온 게 우리 한국교회의 솔직한 모습이다. 신자들이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께 많이 바치는 것만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쳐왔다. 교회도 세상건물 못지않게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교회버스니 교회공동묘지니 수양관이니 해서 일단 크고 보려는 세상문화의 물결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개개 신자들도 역시 세상이 악하다고 하면서도 그런 것을 따라가기에 분주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과연 복음과 문화와는 어떤 관계가 되어야할까? 분명한 건 세상문화가 악하다거나 아니면 선하다는 단정은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그 문화 자체보다는 그 문화를 만들어가는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하다. 문화는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이 문제도 역시 인간론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이 비록 악하더라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아야 할 존재라면 이 세상 문화 역시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다. 굳이 리챠드 니이버의 구분에 따르자면 그리스도를 문화의 변혁자로 간주하는 다섯 번째의 유형이 가장 복음적 입장이라 볼 수 있다. (9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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