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의 안과 밖

요즘은 덜하지만 한때 ‘포트스모더니즘’(postmodernism)이란 말이 철학, 미술, 연극영화, 문학, 그리고 신학에 이르기 까지 거의 모든 인문사회과학과 예술 부분에서 일종의 유행어가 되다시피 오늘의 시대정신을 특징적으로 규정해 보려한 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포스트’(post)란 ‘지나갔다’는 뜻이며, 모더니즘(modernism)이란 ‘근대주의’를 뜻한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근대주의 이후’, 혹은 ‘후기 근대주의’라 할 수 있다. 이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오늘의 시대가 모더니즘의 구조로 부터 근본적으로 벗어났다는 것인데,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적으로 모더니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해야 한다.
모더니즘은 중세나 근세와 구별되는 의미로서 현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긴 하지만 어원적 의미로 보면 역사해석적인 결단, 즉 시대정신이나 철학적 패러다임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철학사적으로 볼 때 모더니즘은 <이성의 빛>에 근거해서 세계와 사물을 밝히려는 작업인 계몽(Aufklärung)의 패러다임으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모더니즘이란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생각해서 인간을 깨우치고 기술과 과학을 발전시킴으로써 매우 합리적이고 진보적인 역사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낙관론적 역사인식으로 인류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채색된 유토피아니즘과 연결되었다.
사실 모더니즘 정신에 의해 오늘 20세기 문명이 꽃을 피웠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 더구나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자본주의의 풍요는 인간의 이성과 그에 근거한 산업화의 결과다.18,19세기에 물리학과 생물학이 새로운 지평에 올라섰고,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의 불길이 솟아올랐으며, 여러 부분에서 인간능력이 끝 간 데를 모를 정도로 확장됐다. 그런 노력과 과정의 결과로 지구상에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인류가, 물론 부분적으로는 아직도 복지와 상관없이 사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놀라울 정도의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이성과 계몽을 그 정신으로 하고 있는 모더니즘에 놓여있다.
오늘의 문명을 있게 한 모더니즘이 그 앞선 세대와 구별될 수 있는 점은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본다는 점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한 설명이 좀더 필요한 것 같다. 중세기 까지 사람들은 자율적이지 못하고 타율적인 정신을 갖고 살았다. 인간을 압박했던 가장 큰 세력은 정치와 종교였다. 황제와 교황이 유럽인들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이미 주어진 정치적, 종교적 틀에 따라 살았다.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질서는 너무 분명했고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런 삶이 그들에게는 아주 편리했을지 모른다. 이미 주어진 전통대로, 그들의 조상이 하던 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 이렇게 주어진 틀에 타율적으로 적응해 오던 인간역사 가운데서 그것을 거부하고 인간 이성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고 가치 판단하는 일종의 정신적 혁명이 발생했다. 대표적인 사상가는 데카르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그는 기존의 모든 질서와 전통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분명한 건 자신의 생각하는 의식이라고 했다. 그의 뒤를 이어 칸트는 순수이성으로 세상을 범주화 했으며, 헤겔은 절대정신을, 쉴라이에르마허는 절대의존의 감정을 그렇게 생각했다.
여러 사상가들의 주장이 서로 다르긴 하지만 일치하는 바는 인간을 이성적 주체로 생각한다는 점이며 여기서 모더니즘의 거대한 사고구조가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유럽의 정신사를 집대성한 인물이 <역사철학>을 집필한 헤겔이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역사는 정반합의 원리에 따라 이미 주어진 그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절대정신인 하나님이 지배하는 사랑의 궁극적 미래를 향해 원칙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이 역사는 발전이라는 메커니즘 가운데서 하나님이 온전히 계시될 그 세계를 향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모더니즘은 이런 사유를 관통해 오면서 발전을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그 결과가 오늘 우리의 자본주의이기도 한다.
우리는 모더니즘이 우리 인류에게 가져다준 적극적인 부분들을 격하시킬 필요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발전과 풍요 못지않게 우리 인류에게 다가온 폐해 또한 간과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두 가지 점을 고찰하고자 하는데, 하나는 모더니즘의 원리이며, 다른 하나는 그 결과에 대한 것이다.
첫째, 인간 이성이 그렇게 신뢰할만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을 계몽시키고 교육시키면 만족할만한 세계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사실 인간 이성은 그렇게 믿을만 하지 못한다. 1,2차 세계대전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한국전쟁, 월남 전쟁, 중동전쟁 등 이성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저지르는 행위들은 별로 바람직스럽지 못했다. 모더니즘이 인간의 이성을 강조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성이 도구적으로 사용됨으로써 도덕성을 상실하게 됐다는 말이다.
둘째, 모더니즘에 의해 이룩된 오늘의 풍요는 그만한 대가를 치루고 있다. 인간소외와 생태계의 파괴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런 풍요에 버금갈 정도의 힘으로 인간을 파괴시키고 있다. 5백 년 전 사람들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문제점들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인정해야하는 바는 인간이성과 합리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모더니즘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이 각기 상반되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9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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