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지난 1월8일 미국 대법원에서는 “의사가 회생 불가능한 중병환자의 자살을 도울 수 있는가?”라는 주제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소위 안락사가 합법인가, 불법인가에 대한 최고심에 들어갔다는 말이다. 이미 90년도에 대법원은 “환자가 인위적인 생명연장 기구 부착을 거부할 권리를 갖는다.”고 판결한 바 있지만, 이제는 그런 소극적인 차원이 아니라 “환자가 자신의 생명을 단축할 수 있는 투약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에 까지 이르고 있다. 즉 고통당하고 있는 말기 암환자가 편안히 죽기를 원할 때 의사가 약물을 투여하는 것이 괜찮은가에 대한 논의다.
여기에는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지만 주로 찬성 쪽의 추세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찬성하는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이 죽음에 까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온몸이 뒤틀리고 음식을 토해내며, 대소변을 가리지도 못하고, 고통에 못 이겨 하루 온종일 신음소리를 내며 몇 년이나 몇 달 더 사는 것 보다는 주사 한대 맞고 편안하게 죽는 게 보다 인간적이라고 한다. 반대하는 이들은 과연 누가 회생불가능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라는 원천적인 질문으로 부터 시작한다. 만약 백만분의 일이라는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오히려 인간적인 행위지 약물투여로 간단하게 죽음을 택하는 게 인간적인 행위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조치들이 남용된다면 치료비가 많이 들어 가족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고 생각해서 안락사를 택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
안락사 문제는 참으로 풀기 어렵다. 불치병에 걸린 당사자와 가족이 당하는 육체적, 경제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더구나 병의 진행이 말기에 도달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생명을 끊는 게 그를 위해서나 가족을 위해서도 훨씬 인도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한 경우로 전쟁 중 치명적 부상으로 인해 거의 죽어가면서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를 총으로 쏴서 죽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행위를 범죄라고 할 수는 없다. 견딜 수 없는 고통, 특히 회생가능성이 전혀 없는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라는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동감하게 된다. 인간의 생명을 가치 있게 하기 위해서 <근엄하게 죽을 권리>를 허락해야 한다는 말이다.
안락사 주장은 충분한 휴머니즘에 근거함으로써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안락사 문제는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으로는 대답을 찾기 힘들 것 같다. 만약 그 어떤 대답이 절대적인 선이 될 수 없다면 우선 인간과 그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부터 대답을 찾아가는 게 바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락사에 동의하는 많은 이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추하게 살아갈 바에야 편안하게 죽는 게 낫다고 말이다. 이런 죽을병에 걸리기 전에는 대단히 품위 있게 살았는데 이제는 추악한 모습이 되었으니 살맛도, 기력도 없고, 차라리 이럴 바에야 죽는 게 훨씬 인간다운 일이라고 한다. 그들은 품위 있었던 지난날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얼굴에 잔잔한 미소, 생기 넘치는 피부, 스포츠, 가족들과의 외식, 바캉스, 정원 가꾸기 등 멋있는 삶들만이 품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모든 게 단절되고 오히려 육체적 아픔 안에 갇혀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걸 그들은 도저히 용납하지 못한다.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끊어도 괜찮다면 이 세상에는 그렇게 죽어야 할 생명이 너무나 많다. 치료 불가능한 정신병자들은 스스로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힘들기 때문에 죽어야하는가? 사고를 당해서 육체적 고통 가운데서 평생 누워 지내야 하는 이들은 스스로 생명을 끊어야할 이유를 갖는 걸까?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순간적인 절망이나 열광이 그를 죽음으로 유혹하기도 한다. 예컨대 사교집단에서 집단자살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들도 역시 이 땅 위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안락사를 정당화 한다면 사교집단의 집단자살을 문제 삼을 이유가 아무데도 없다. 물론 안락사를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다른 점을 나름대로 변호하려 할 것이다. 자신들은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교집단도 역시 그렇게 말할 것이다. 고통스럽고 불의한 이런 세상에서 생명을 연장하기 보다는 다른 세상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야말로 참된 생명이라고 말이다.
안락사 쪽에서 주장하는 또 한 가지의 문제점은 어차피 죽을 바에야 조금이라고 고통을 빨리 덜어주는 게 의사로서의 도리라는 점이다. 이들은 7,80년의 인생에 비해 반년, 혹은 서너 달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수억 년이라는 우주의 시간에 따르면 7,80년의 인생은 먼지에 불과하다. 몇 달이 짧기 때문에 안락사도 가능하다면 7,80년의 인생도 너무나 짧기 때문에 건강하더라도 자살하는 게 훨씬 낫다고 할 수 있다.
안락사는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허무주의다. 멋있고 품위 있게 살지 않으면 삶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풍요의 사회가 몰고 온 허무주의며 교만이다. 동남아 같이 가난하지만 삶에 치열한 나라의 백성들에게 안락사 문제는 정신적 사치에 불과하다. 생명은 어쩔 수 없이 끊어지는 그 순간 까지 우리가 투쟁하듯이 지켜나가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지 자신의 결단에 따라서 적당하게 처리해 버려도 될 그 무엇이 아니다.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온다하더라도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가르침은 이런 점에서도 여전히 정당성을 갖는다. <1997.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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