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사태’를 돌아본다

지난 연말 노동법과 안기부법 불법처리 공방으로 인한 한바탕 난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 한보철강 부도 및 특혜대출 건으로 인해 수주일 동안 이 나라가 호떡집에 불난 듯했다. 5조원이라는 돈을 대출받은 한보철강은 반액 정도만 시설에 투자했으며 나머지로는 기업 확장과 뇌물공급에 사용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의 성역 없는 조사 지시 이후 검찰이 본격적으로 사건조사에 나서 한보철강 총회장과 재정본부장, 그리고 제일은행장과 조흥은행장, 국회의원 홍인길, 정재철, 황병태, 권노갑, 그리고 김우석 내무장관을 구속했다. 보통 문제 같았으면 국회의원이나 장관 한 사람 정도 구속되더라도 사회적 반향이나 파장이 상당했을 텐데 이번 사안은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에 그런 정도로 민심이 수습될 것 같지 않다. 민심은 둘째 치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배후 인물을 명명백백하게 밝혀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많았는데 안타깝다.
이 사건에 집중된 관심은 과연 누가 5조원에 달하는 융자가 가능토록 압력을 가했는가, 하는 점이다. 야당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의 둘째 아들로서 큰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구설수에 오른 김현철 씨일 가능성이 많다면서 그를 수사해야만 한다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몇몇 매스컴도 동조하고 있는 이 의견은 아직 실증적인 단서가 없는 단순한 설에 불과하긴 하지만 정황으로 볼 때 대통령과 여당을 위해서라도 최소한 국회 청문회에서 한번 집고 넘어가야 할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사건에 대한 정치적 해석을 가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이들과 어떤 정당은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받았으며, 다른 이와 다른 정당은 약간 덜 타격을 받았을 뿐이지 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사건이 가라앉으면 그들은 또 다시 정치적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권모술수를 쓰게 될 것이며 국민들은 요술피리소리에 홀리듯 그들의 정치논리에 아주 쉽게 빠져들고 말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관점은 이 사건이 담고 있는, 혹은 드러내고 있는 인간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일단 한보사태가 담고 있는 문제의 틀이 무엇인지 밑그림을 그려보자. 5조원이라는 돈이 너무 많았다는 게 놀랍지 그 안에 담겨 있는 메커니즘은 아주 단순하다. 포항제철에 버금갈 정도의 철강회사를 꿈꾸던 정태수 총회장은 다른 기업들이 항상 그렇게 하듯 은행에서 돈을 끌어다가 제철회사를 차렸다. 그 돈이 5조원에 이르렀는데도 회사는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계속 투자만 하다가 결국 어음결제를 못해서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이렇게 부도나는 회사는 하루에도 수십 개, 수백 개가 되기 때문에 부도 자체만으로는 별 문제가 아니다. 다만 융자금액이 5조원이나 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까다롭기도 유명한 은행장들이 충분한 담보물을 확보하지도 못한 채 융자를 해주게 된 이유가 어디 있는가에 의심이 모아지게 됐다. 사건이 터진 초기에 은행장들은 합법적으로 융자를 해줬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나 검찰의 형식적인 수사만으로도 융자압력이 많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어떤 국회의원은 8억, 어떤 이는 2억 등을 받아 챙기면서 은행장들에게 대출압력을 가하거나 아니면 국회 상임위에서 한보문제를 거론치 않도록 조치했다.
이번에 구속된 인사들이 구속당시 보여준 당당한 태도를 보더라도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별로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일단 실정법에 따라 구속되기는 했지만, 또한 앞으로 재판과정을 통해 실형이 선고됐겠지만, 그들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바꿔 놓고 생각해 보자. 만약 내가 재경위에 속한 국회의원이거나 청와대의 모모한 수석비서관인데, 평소 안면이 있거나 전망이 있는 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사업 프로젝트를 그럴듯하게 설명해서 나의 판단에도 그 사업이 국가경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사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은행장에게 필요한 자금을 융자해 줄 수 있도록 언질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어려움에 빠진 기업을 살리거나, 더 잘돼서 국가경영에 큰 도움이 된다면 잘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한보에 관련된 인사들 중에서 한보가 이렇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한 이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며, 또한 한보 정총회장이 기업을 잘 운영해서 부도가 나지만 않았다면 이들 인사들은 자신의 행위를 추후에라도 보답을 받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돈을, 그것도 수억 원의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지만, 이번에 구속된 사람들이 몇 억 원이라는 돈 때문에 그런 일에 가담한 것은 아닐 것이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런 대출과 관련된 압력행사가 관행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기업 활동은 자의건 타의건 거의 이런 정경유착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보만이 아니라 그 외의 모든 대기업이나 중소기업도 크고 작은 뇌물이나 떡값에 연관되어있다. 사실은 어디 기업 활동만이겠는가. 교육현장에서도 그렇고 예술과 문학계에서도 이런 관행들이 보편화 되어 있다.
이번 한보사건을 처리하는 검찰은 소위 ‘깃털’만 뽑다 만 겪이지만 설령 몸체 까지 건드렸다 해도 재수 없어서 나만 걸렸다는 생각이 만연돼 있는 한 이런 일들은 다시 일어난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일등만 해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기 때문에 설령 나중에 산수 갑산에 가는 일이 생기더라도 뇌물을 통해서라도 일을 성취하려고 하고, 그게 별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한보사태는 한 두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우리 국민전체의 생존양식에 연관된 문제라고 보는 게 옳다. <1997.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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