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서 삶으로

한 인간이 7,80년의 인생을 살면서 소비하는 물질은 얼마나 될까? 태어나서 부터 죽을 때 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먹고 쓰고 사니까 참으로 대단히 많은 걸 소비할 것 같다. 쌀이나 과일처럼 먹거리로부터, 구두나 옷처럼 몸을 치장하는 일, 종이나 볼펜 같은 문방용품, 그 외에 승용차, 휘발유, 화장품, 화장지, 컴퓨터, 술, 커피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품을 먹고 쓰며 살아간다.
이 지구에서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다른 동물들은 우리 인간처럼 소비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코끼리처럼 먹성이 큰 동물들도 인간만큼 다양하게 소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저 먹고 배설하고 살면 그만이지만 인간은 입어야 하고 즐겨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이 생산하고 판매하고 소비한다. 또한 옛날 사람들에 비해서 오늘 현대인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쓰며 산다. 예컨대 신생아의 배설물 처리에 있어서도 요즘은 일회용을 많이 사용하는데, 옛날에야 그저 면 기저귀 몇 개로 아이를 키웠고, 그걸 대물림 까지 했다. 남자들의 면도만 하더라도 그렇다. 옛날에야 요즘처럼 일회용 면도기를 사용했겠는가? 결국 문명은 소비를 그 본질로 한다. 그걸 자랑으로 삼는다. 세상을 온통 잡아먹을 듯이 땅속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그리고 그걸 기초로 해서 공장에서 숫한 물건을 생산해내고, 그걸 쓰는 재미로 살아간다.
우리가 육체를 갖고 있는 한 물질을 사용하고 살아가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대 그게 너무나 지나치다는데 문제가 있다.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라도 그 속도를 늦추어야 할 텐데 속수무책이다.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그저 누가 더 많은 걸 소유하고 소비하는가에만 관심을 갖는 것 같다. 그게 바로 잘난 인간의 모습인 것처럼 말이다. 과연 그런가? 잠시 왔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가 더 많이 소비하는 게 더 잘사는 것이며, 더 인간적인 삶인가?
신문보도에 의하면 96년 내수용 소비재 수입은 95년에 비해 24.5% 증가한 152억 달러로 집계됐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 대충 13조원이다. 소비재 수입이라고 해서 모두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중국이나 태국 등에서 저가품 가정용품은 당연히 수입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도 그들에게 자동차를 팔 수 있다. 그런대 우리 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건 사치성 제품에 있다. 96년 1년 동안 승용차는 4억1천만 달러어치가 수입됐는데 95년에 비해 68% 증가됐다. 화장품 수입액도 50%가 늘어난 3억5천만 달러, 각종 의류도 41.3%가 늘어난 14.3억 달러, 고급신발은 62%가 증가한 1억5천만 달러, 골프용구는 76% 늘어난 1억1천만 달러, 위스키는 54% 증가한 1억8천7백만 달러였다. 경제가 어렵다고 모두 한탄하고 있던 96년도에 우리는 시급을 요하지 않는 물건을 이렇게나 많이 수입 해다가 써버렸다. 수입액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단순한 사실보다도 더 심각한 건 우리 삶의 곳곳에 이런 소비 지향적 습관이 뿌리를 박고 있다는 점이다.
고급 아파트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부엌개조를 위해 서슴지 않고 5천만 원을 투자한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고급가구, 골프, 요트 등 스포츠 용품, 모피 같은 고가의 수입의류는 백화점이나 대형전문점에서 <특수계층> 중심으로 소비됐으나 이젠 이런 최고 수입명품을 내건 각종 전문점들이 웬만한 번화가에는 다 들어찼다. 보통 1,2백만 원대의 숙녀복, 3백만 원대의 신사복이 불티나게 팔리고, 1,2천만원대 이탈리아제 소파, 3천만원대 영국제 식탁의 판매량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손님 접대를 위해 한 병에 2백만 원 씩하는 프랑스제 코냑 루이13세도 없어서 못 팔 정도다. 하긴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쓰는 것도 죄가 되느냐고 따진다면 할 말은 없지만.
소위 졸부들의 소비형태만이 문제는 아니다. 서민들도 남을 의식한 충동구매 내지 과소비를 절제하지 못한다. 다른 이들과 형평을 맞추기 위해서 고급 승용차를 타야하고 아파트에 대형 에어컨을 설치해야 하며, 고급 음식점을 드나들어야 한다. 유행에 따라 옷을 사 입어야 한다.
옛날이야기를 해봐야 별로 현실성 없는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는 대개가 계절별로 여름옷, 봄가을옷, 겨울옷 한 벌씩만 있으면 충분했다. 신발도 고무신이나 운동화가 다 떨어질 때 가지 열심히 신고 다녔다. 그래도 별로 불편한 것 없이 재미있게 살았다. 그런대 요즘 아이들은 너무 옷이 많아서 탈이다. 도시 학생들은 십만 원 짜리 운동화를 신고 다닌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최소한의 먹거리, 옷이 부족해서 야단들인데 우리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쓰지 못해서 야단들이다. 분명한 건 두벌 옷을 갖고 있으나 한벌 옷을 갖고 있으나 살아가는 데는 별로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소비 중심적 문명으로 부터 벗어나지 않는 한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 지구가 영원히 인간의 소비욕을 충족시켜 주리라는 생각은 엄청난 착각이다. 현대인이 파괴시킨 지구의 생태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소비 지향적 삶의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생태학자들의 경고를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한다.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이런 생태학적 거대담론에 학문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다만 소비지향적인 삶으로 부터 사는 것 자체에 중심을 두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해야겠다. 이건 그렇게 복잡하고 심오한 뜻을 갖지 않는다. 소비를 줄이면 된다. 가능한대로 소비를 줄이며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과소비는 분명히 죄다. <1997.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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