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육

얼마 전 K대학교 교수님들과 식사할 자리가 있어서 들은 말인데, 신입생을 학부별로 선발하게 될 내년부터 철학개론 과목이 교양필수에서 교양 선택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교양 필수로 남는 건 교양영어, 컴퓨터, 종교과목, 그리고 한두 가지 실용과목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대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실제적으로 긴요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학습시키겠다는 이러한 교육의지는 소위 말하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대학생들에게 국제적 차원에서 경쟁력을 높여 주기 위한 특단의 조치라고 생각된다. 말하자면 사회 진출에 가장 효과적인 과목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야만 그 대학교의 명성이 드러나게 되고 그게 바로 학교 행정을 책임진 사람들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잣대라고 보기 때문에 그러한 커리큘럼의 변화를 가져온 것 같다.
오늘의 한국 대학은 엄청난 회오리바람 가운데 놓여 있다. 앞으로 입시생 숫자의 격감으로 인해서 웬만한 대학은 미달 사태에 직면하게 되고, 당연히 대학 사이에 무한경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외국의 유수한 대학들이 한국에 분교를 설치하는 등 교육의 개방화 바람에 휩싸이게 된다. 그동안 한국의 교육 사업은 중고등학교로 부터 대학에 이르기 까지 사실 장사가 잘되는 업종이었다. 대학이라는 간판만 내걸면 신입생들이 물밀듯이 들이닥쳤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워낙 부족하다보니 교육을 공급하고 있는 대학 측에서는 이리 저리 가려서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공납금도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이런 사업은 땅 집고 헤엄치기 격이어서 요령만 터득하면 짧은 시간 안에 큰돈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좋은 시절이 지나갔다. 어쩌면 10년 안에 적지 않은 대학이 문을 닫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정부에서도 한국 대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각 대학의 교육환경 평가를 통해 지원금이나 신입생 정원에서 차별성을 주고 있으니 대학의 생존경쟁은 일반 기업 빰칠 정도가 될 수밖에 없다.
이제 대학당국이 정신 차리고 대학의 발전을 위해 전력투구 한다는 건 일단 바람직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가 상호간의 경쟁원리에 따라 발전하는 경제, 사회체제라고 할 때 대학의 경쟁은 당연하다. 문제는 이런 경쟁력 제고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면 교육의 본질이 훼손될 염려가 있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한 <철학개론>을 선택과목으로 처리했다는 게 가장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철학 과목은 보기에 따라서 학생들의 경쟁력 제고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존재와 인식, 진리와 세계, 그리고 역사와 미래 등에 대한 이해가 직접적으로 직업선택에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생들에게 철학과목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건 참으로 비참하다 못해, 무지의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고등학생들도 이런 철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한국교육의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는 마당에 대학에서마저 제외시킨다는 건 어느 쪽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 철학이 없는 민족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돈만 벌줄 알지 인간과 그 삶에 대한 천착이 전혀 없다. 인간이 무엇인지, 시간의 의미가 무언지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가는 백성들이다. 근본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는 걸 싫어하고 그저 충동적으로, 즉흥적으로, 직관적으로만 살아가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의 젊은이들이 TV와 컴퓨터 문화에 종속되어 있는데, 이들에게 최소한의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철학개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건 대한민국 백성을 모두 돈 버는 기계로 만들려는 거대한 프로젝트의 일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한국 교육은 상품논리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품논리에 의해 진행되면 당연히 교육의 생산성은 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교육의 생산성이라는 게 매우 기계적이어서 정작 필요할 경우에는 무능력하게 작용한다. 예컨대 고등학교 교육의 목표는 오로지 대학에, 그것도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것에만 모아져 있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공부하게 되면 당연히 좋은 성적을 얻게 된다. 전투하듯 학생들을 학습시켜서 높은 합격률을 자랑하는 게 바로 우리 고등학교 교육의 현장이다. 좋은 대학에 합격한 아이들은 그런대로 자신의 목표를 성취했으니까 만족할지 모르지만 대학에 떨어진 더 많은 아이들의 삶은 무엇으로 보상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수년 동안 함께 따라다니면서 고생했지만 아무 것도 소득을 올린 게 없다.
좋은 대학도 필요하고, 공부벌레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더 많은 학생들을 그런 경쟁에 들러리로 세워야 할 필요는 없다. 모두 같이 있는 그대로 공부하다가 약간 뛰어난 학생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렇지 못한 학생은 취업을 하든지 기술을 배우면 된다. 모든 학생을 대학만을 목표로 교육시킨다는 건 국가적 낭비이며 인권적 차원에서도 문제다. 다시 말해 대학입시를 목표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 건전한 인간형성을 위한 교육을 시키라는 말이다. 그래야만 철학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제2외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여러 예술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이제는 입시지옥이 고등학생만이 아니라 대학생에게 까지 옮겨졌다. 대학마다 취업률 제고에 여념이 없을 정도다. 정상적인 인격자를 키우기 보다는 톡톡 튀며 약삭빠른 인간으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대학당국 책임자들의 생각이 결국 철학과목을 교양필수에서 선택으로 바꾸게 되었다. 머리가 텅 빈 기술자만 만들려는가 보다.(9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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