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적 노동구조를 위해

지난 네 달간에 걸친 교회 건축을 옆에서 기웃 거리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건물을 짓는 게 생각보다는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복잡한 것 같기도 했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경험을 쌓는다면 그런대로 그럴듯하게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하나의 건물이 세워지려면 엄청나게 여러 종류의 기술이 필요하다. 땅 파는 것에서 부터 거푸집을 짜는 일, 철근을 짜 넣는 일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전기, 칠, 방수, 타일, 알루미늄, 스테인리스, 장판, 돌, 씽크, 이런 것 말고도 여러 가지다. 그런데 어떤 일들은 거의 같은 종류인데도 완전히 구분되어 있었다. 예컨대 벽돌을 쌓는 일과 세멘 바르는 일, 그리고 벽돌 사이에 검은 흙을 채워 넣는 일이 그렇다. 밖에서 볼 때는 그게 그것 같은데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런 일 사이에 넘지 못할 경계가 분명했다. 또 도배와 모노륨 까는 일을 한 사람이 하지 못한다. 이런 모든 일들이 나름대로 전문적이니까 아무나 대충 달려들어 할 수 없긴 하지만 별것 아닌데도 자기들 것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 때문에 일이 복잡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위에서 본대로 막노동에도 그렇지만 현대의 노동이란 이처럼 철저한 분업을 그 특징으로 한다. 자동차 생산에도 여러 회사가 연관되어 있다. 마후라를 만드는 회사는 그것만, 브레이크를 만드는 회사는 그것만, 캬브레다를 만드는 회사는 그것만 생산하고, 자동차 조립 공장에서 그 여러 부품을 모아 차를 완성시킨다. 아무리 큰 자동차 회사라고 하더라도 자기들만의 힘으로 자동차를 생산해 낼 수는 없다. 잘은 모르지만 요즘은 이런 분업이 국내만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 같다. 중국제 백밀러가 가격과 품질 면에서 괜찮다면 누구라도 그걸 수입해다 쓰게 마련이다. 분업은 이런 품목의 다양성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같은 회사 안에서도 같은 원리도 적용된다. 5백 명의 직원을 가진 브레이크를 만드는 회사가 있다고 하자. 5백 명의 직원이 각자 브레이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여러 공정을 나누어 한 사람이 하나의 공정만 책임지도록 한다. 강철을 찍어내는 사람, 그걸 가공하는 사람, 광을 내는 사람, 나사못을 조이는 사람, 시험하는 사람, 포장하는 사람 등으로 나뉜다.
이런 분업은 생산성 향상이라는 원리 가운데서 형성된 경제 원리다. 각각의 사람이 모든 생산과정을 책임지는 방법보다 그 수의 사람이 각기 한 부분만 책임지는 방법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말이다. 바늘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고 하자. 열 사람이 각기 철을 잘라서 연마하고 구멍을 뚫고, 해서 하루 종일 만든다면 1백 개를 만들 수 있고, 열 사람이 철을 잘라내는 일, 연마하는 일, 구멍을 뚫는 일을 나누어 한 가지 일만 전문적으로 한다면 3백 개는 만들 수 있다. 분업은 근대 산업발전에 혁명적인 성과를 가져온 경제 원리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 정도의 분업이 가장 높은 생산성을 올리면서 동시에 노동의 인간적인 부분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오늘 지나친 분업으로 인해 노동하는 인간의 인간다움이 훼손되고 있다. 노동은 재화벌이만이 아니라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길이기도 하다. 인간은 노동함으로써만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이런 인간의 본질적인 면에서 추구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첨예화된 분업화 가운데서 노동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인간적 얼굴을 갖고 추구하는 노동을 찾을 수 없다. 매일 똑같이 아홉 시간씩 나사못을 조이면서 어떤 노동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겠는가? 매일 드릴로 구멍만 뚫고 살면서 어떻게 노동과 자유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오늘의 노동은 인간의 얼굴을 갖지 못했다. 그저 생산성 향상이라는 절대 이데올로기에 숙명처럼 자신을 얽매어 두고 살게 되었다.
개인적인 이야기가 허락된다면 내 아버지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고 싶다. 그분은 평생 동안 함석세공을 하셨다. 내가 어렸을 때 연장통을 메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분은 함석을 사다가 자기의 생각에 따라 가위질을 하고 땜질을 하면서 작품을 만들어 냈다. 기와집 처마 물받이를 하거나 물동이를 만들었다. 혼자서 모든 걸 다했다. 물론 그분도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했지만 그 일 자체에 기쁨을 갖기도 했다. 자신이 이룬 어떤 노동의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통합적 노동이었다.
물론 우리가 지금 가내공업식의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목수가 혼자서 톱질, 대패질, 못질, 니스 칠을 하며 문짝을 만들듯 자동차를 생산해 낼 수는 없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다가는 회사를 말아먹게 된다. 다만 아무리 경쟁 구조 속에서 생산성이 절대시 된다 하더라도 보다 중요한 노동의 요인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해야 한다. 생산성도 노동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며, 품질향상도 역시 노동하는 인간을 위한 것이다. 노동자의 소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참여하는 노동 자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경제가 발전했다면 노동 자체의 품위를 생각할 때가 되었다. 힘들고 더러운 일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노동과정의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분업화라고나 할까. 벽돌을 쌓는 사람이 벽돌 사이를 메울 수 있도록 하자는 말이다. 공정을 줄여나가면 아무래도 생산성이 떨어질 수 있지만 그래도 그것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노동의 가치를 좀더 많이 확보하게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노동이 창조적 행위로 승화 될 수 있기 위해서 말이다.(96.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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