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아름다움

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해 본적이 없는 사람으로서 <미학>이 무언지 잘은 모르지만,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학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어설픈 정의가 대충 들어 맞다면, 이 미학이야말로 우리 인간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학문일 것이다. 미(美)에 대한 직관을 갖고 산다면 인생을 그만큼 더 풍부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이 아름다움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다. 멋있게 보이려고 애를 쓴다. 여자나 남자들 모두 미에 관심이 많다. 아무리 불경기라 해도 화장품 회사만은 불경기를 타지 않는 걸 보아도 알 수 있다. 물질적으로 잘살려고 애를 쓰는 것도 사실은 남에게 멋있게 보이려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주 많은 경우에 이 아름다움을 착각하고 있다. 착각했다기보다는 많은 경직된 생각 때문에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채지 못하고 살아간다. 단순히 남의 흉내를 낼 뿐이다.
최근에 젊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미를 경쟁의 대상으로 올려놓는 일이 많아졌다.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나 슈퍼 모델 선발대회 등, 비슷한 유의 모임들이 줄줄이 사탕 식으로 열린다. 그만큼 상품 가치가 있다는 말인데, 거기서 제시되는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게 참으로 해괴하기 그지없다. 오똑한 코, 쌍거플 진 눈, 롱다리, 이런 기준들이 도대체 한국 일반 여성들에게 말이나 되는가? 대개는 짧은 다리고, 쌍커플이 없고, 코도 납작한데, 왜 서양여자들의 기준으로 아름다움을 평가하는가? 이렇게 여성의 미를 선전해 댄다면 그런 기준에 들지 못하는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심한 콤플렉스에 빠지게 됐다. 그러다 보니 모두 다 그렇게 되려고 성형 까지 한다. 최진실의 얼굴, 황신혜의 얼굴이 아름다움의 절대치처럼 생각들 해서, 그런 얼굴로 성형을 한다. 과연 그럴까? 그런 그림 같은, 조각해 놓은 듯한 얼굴이어야만 아름다운가?
이건 분명히 착각이다. 상품으로서의 아름다움이라면 모를까 진정한 아름다운과는 거리가 있다. 아름다운 여성은 어느 특정하게 생긴 이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모든 여성 각자를 말한다. 모두가 아름다운 여성들이다. 모두가 찬란한 아름다움을 가졌다.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쌍커플이 있든 없든, 코가 높든 낮든, 뚱뚱하든 날씬하든 상관 없이 모든 여성들이 아름답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좀더 심미적 차원에서 보면 존재 자체가 아름답다는 말이다.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여성, 혹은 남성, 그렇게 생긴 백인, 혹은 흑인은 오직 유일한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와 견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진 셈이다. 더 아름답다거나, 더 못났다거나 하는 말은 인간을 상품으로 생각할 때나 가능하다. 이제 우리는 아름다움을 상품가치로서가 아니라 존재가치로서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그럴 때만 우리의 눈에 이 세상의 모든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모든 사물을 상품으로만 바라보고 살아가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놓친다. 조금 돈을 잘 버는 위치에 있으면 잘난 체하고, 그렇지 못한 위치에 들어가 있으면 열등감에 빠져 산다. 도대체 이 땅위에서 잠시 존재하고 떠나야 하는 우리가 그럴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 땅에 있는 모든 존재가 아름다운데,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찬란한데 그럴 이유가 있을까?
상품가치가 아니라 존재가치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게 무얼까? 꽃을 예로 들어보자. 간혹 어느 교회의 행사 때 교회 강단에 수십만 원 어치 꽃으로 장식되는 걸 볼 때가 있다. 참 멋지구나 하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얼마나 들었을까? 저 꽃꽂이를 한 집사님은 어젯밤에 한숨도 못잤겠구나. 생전 처음 보는 꽃도 많네.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이런 화려한 꽃이 아름다운 건 분명하다. 그러나 꽃의 아름다움은 수십만 원이 투자된 그런 꽃꽂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깊은 산 속 음지쪽에 살며시 자리 잡고 있는 어느 야생화를 머릿속에 그려보라.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찬란한 아름다움이다. 손재주 있는 꽃꽂이 담당 집사님의 손길이 가 닿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성도들의 눈길이 집중되지도 않았지만, 비바람에 그저 그렇게 노출되어 있었지만 그 야생화의 아름다움은 찬란하다. 꽃은 어디 있든지 꽃이다. 반드시 상품으로 만들어 놓아야만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꽃이라는 이유 하나로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어디 꽃만이겠는가? 이 지구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그렇다. 나무도 그렇고, 강도 그렇고, 산과 들, 그리고 사슴과 토끼와 멧돼지와 꿩 등 모든 사물과 생명체가 있는 그대로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그렇지 않은 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심지어는 똥도 아름답다. 모든 존재론적 아름다움은 바로 성서의 창조론적 기초다.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장).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람을 상품가치로 보지 말고 존재가치로 바라보도록 해야 한다.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다. 그렇게 거기 존재해 있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일이요, 찬란한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사람을 바라보고 살라는 게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닐까?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그리고 계층에 관계없이, 종교적 경건성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만나고 사랑하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상품가치로 보려는 생각을 거두어 들여야 한다. 더구나 돈 버는 재주로 인간을 판단하는 그런 못된 사고방식을 잘라내야 한다.(96.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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