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근거

이 지구 위의 만물(萬物)은 어디서 시작했고, 지금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됐을까? 그리고 결국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이런 질문은 철학자들의 궁극적 관심일 뿐만 아니라 호모사피엔스(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리고 계속해서 빠져들게 되는 관심이다. 자연과학의 목적도 역시 만물의 존재근거와 그 구조에 대한 탐구라는 면에서 인간의 모든 과업은 이런 질문과의 연속성 가운데 있다고 보아야 한다.
조금 쉽게 생각을 정리해 보자. 여기 책상 위에 몇 송이의 꽃이 담겨 있는 꽃병이 있다. 그 꽃은 어디서 왔는가? 어느 화원에서 재배된 걸 누가 사왔을 것이다. 그 화원의 주인은 어떻게 꽃을 키웠을까? 꽃씨를 제때에 맞춰 밭에 심었고 적당하게 물을 주고 해서 키웠을 것이다. 그 씨는 어디서 왔는가? 그 전해에 꽃이 지고 난 그 자리에 달린 씨를 보관해 두었을 것이다. 그렇게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꽃에서 씨가 나고 씨가 다시 꽃을 피우는 생명의 순환이 계속해서 지금 까지 유지되고 있다. 봉숭아, 나팔꽃, 채송화, 맨드라미가 모두 그렇게 생명을 연장해 왔다.
그 꽃만이 아니라 꽃병이라는 사물은 왜 이 시간에 책상 위에 올려져 꽃을 담고 있는 걸까? 흙으로 구워 만든 것이든, 유리를 녹여 만든 것이든 이 꽃병은 많은 경로를 거쳐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그 원래의 자리는 모래일 수도, 흙일 수도 있는데, 다만 선택에 의해 지금 모양의 꽃병이 됐다. 꽃병을 받침하고 있는 책상도 그렇다. 책상의 재료인 나무는 태양 에너지를 바탕으로 탄소동화작용에 의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결국 책상은 태양으로 부터 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이 세상 만물의 근원이 여러 모로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복잡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째, 수천 년이나 수만 년의 시간 속에서 짧은 순간 존재하다가 사라진 개체들은 전체 과정 중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말하자면 1980년에 자랐던 해바라기와 81년에 자랐던 해바라기는 거대한 해바라기의 역사 가운데서 무슨 존재근거를 갖는가, 라는 질문이다. 그걸 인간에 대비시켜 볼 수도 있다. 인간 종의 전체 역사 가운데서 개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너무나 초라한 개체, 그래서 거의 비존재와 비슷한, 개중에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던 생명도 있는 터에, 그 작은 개체로서의 인간의 존재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해바라기와 인간은 아예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구도로 비교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해바라기에 비해 우리 인간이 엄청나게 탁월한 존재라는 전제는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인간의 육체와 해바라기의 몸체가 갖는 미세물리학적 구조라는 건 거의 흡사하다. 모든 물질의 기초는 공간과 에너지가 지배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인간이 영혼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존재들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지만 영혼의 문제는 매우 복잡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미지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논외로 하는 게 좋겠다.
둘째, 어떤 이유로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 감나무와 토끼와 인간은 매우 다르게 생겼고, 살아가는 방식도 엄청나게 다르다. 오랜 시간을 두고 다르게 진화해 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건 너무나 도식적이고 안이한 답변이다. 어쩌다가 미루나무도 되고 어쩌다가 피라미도 되고 어쩌다가 인간도 되었다는 건 무책임한 생각이다. 더 나아가 하늘의 별들은 왜 그런 모양을 갖게 된 것일까? 모든 게 우연하게 그렇게 되었다면 그 우연은 기가 막힌 의지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만물이 갖는 현상학적 근거는 어떤 의지의 발현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만물은 오묘하고 다양하고 조화롭기 때문이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서 만물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질문에 생각을 모아보자. 나무와 새와 짐승과 인간의 미래는 어디로 향해 있는가? 앞으로 1만년 후일지, 아니면 10만년 후일지, 혹은 그 이상일지 모르지만, 그 미래에 만물은 어떤 모양을 갖게 될 것인가? 그때도 인간은 여전히 전쟁하고 살인하고 사기를 칠 것인가? 그때 까지도 역시 한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될 것인지, 또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의 여전할 것인지. 만약 인간의 지능이 자연의 섭리를 뒤흔들 정도 까지 발전하게 된다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결정하게 될 것인가? 물론 아무도 이 세계의 미래를 알 수 없다. 인간과 세계의 미래는 무한정으로 개방되어 있을 뿐이다.
지금 까지 산만하게 전개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찾아보자면 이렇다. 만물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고, 그의 나라를 향해 나아간다. 이런 신앙적인 답변을 갖고 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자동적으로 풀리는 건 아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양식과 행동양식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그분의 창조행위에 대해 독단적으로 규정해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신학적으로 언급해도 된다면 이렇다. 하나님은 세상에 의존적이고, 세상은 하나님에 의존적이다. 즉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그 창조된 세계에 의해서만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물인 이 세상은 하나님 안에서만 모든 비밀과 존재이유가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이 세상의 현상을 파악하는 일을 동시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세상과 만물은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며, 하나님은 이 세상의 존재근거가 되시기 때문이다. (9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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