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총련

요즘 정부당국과 대학의 관계자들이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마치 중세기 마녀 사냥하듯 하고 있다. 전국 대학총장, 교무와 학생처장급 보직자들이 한총련 사태로 전쟁터를 방불케 된 연세대학교를 견학했으며, 뿐만 아니라 이 건물을 학생선도의 상징물로 일정 기간 보존키로 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어느 대학은 지금 까지 관행이었던 등록금과 학생회비의 병합 수납을 해제하고 학생회비를 학생 개개인의 자율에 맡김으로써 학생회 활동을 재정적으로 압박키로 했으며, 각 대학에 설치되었던 한총련 산하 지역연합체 사무실을 폐쇄했다. 한총련의 과격행동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 여론을 틈타 학생들의 사회참여활동을 근본적으로 차단해 보려는 의도다.
젊은 학생들이 낭만적, 감성적 자기도취에 빠져 반사회적 행위를 저지를 때 올바로 선도하기 위해 적당한 예방조치를 한다는 건 두말 할 필요 없이 타당하다. 또한 그들이 미처 예상치 못해 저지른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분명한 범법이라면 그만한 대가를 받게 해야 한다는 데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한총련이 금번 광복절을 맞아 추진한 <7차 범민족대회>가 엄청난 불상사를 일으켰으며, 급기야는 한명의 경찰이 돌에 맞자 죽게 된 일 까지 발생한 이상 그에 상응한 처벌도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사건을 기화로 학생운동을, 특히 저들의 사회변혁 운동을 무조건 반국가적이라고 매도해 버리려는 정부와 언론과 국민일반의 의식에 있다. 한총련이 저지른 범법사실 개개를 문제 삼아서 잘못된 건 그만한 처벌을 하고, 그렇지 않은 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버려 두어야지, 이번 사건을 빌미로 무조건 밀어붙이려는 소치는 성숙한 민주사회에서는 불행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지식인들, 그리고 그들의 단선적 논리에 설득당한 일반 대중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총련의 이념이 친북적이기 때문에 차제에 초토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한다. 한총련 집행부가 주사파들이라는 물증들이 여럿 있는 것 같다. 특히 그들의 통일관이 바로 북한이 주장하는 고려연방제라서 문제가 있다고도 한다. 한총련의 입장을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과연 그들이 친북적인지, 주사파 추종세력인지, 북한의 통일논리에 부화뇌동하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일단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든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주의에 담겨 있는 역사이해에 쉽게 빠져들 수 있을 만큼 낭만적인 시기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점에서 그들의 정체를 파헤쳐 우리 편인가, 아니면 나쁜 놈들 편인가, 하는 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면 안된다. 우리와 다른 식으로 말하는 이들의 입을 무조건 틀어막는 게 과연 우리나라를 위해 옳은 일인가, 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적당할지 모르지만 이런 예를 들어보자. 최근 일본은 종전 51주년을 맞으면서 자신들의 전쟁행위를 교묘하게 합리화 하고, 국민들에게 새로운 애국심을 호소하고 있다. 독도 문제도 그렇고, 위안부 문제도 그렇다. 조선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위해서도 괜찮았다는 발언을 정치 지도자들이 끊이지 않고 제기했다. 그런데 일본의 어느 양심적 지식인이 독도는 엄연히 한국 땅이며, 황국신민정책은 불의했고,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의 젊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꼬득여낸 건 최대의 수치이기 때문에 좀더 확실하게 사죄하고 최대한의 보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자. 그는 아마 일본의 여러 언론과 우익 단체들로 부터 격렬한 비판과 항의를 받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테러를 당할 수도 있다. 대일본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실컷 욕을 얻어먹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성숙한 민주사회라면 당장 국익과 배치되는 소리가 있더라도 그걸 용납하게 될 것이다.
인류역사는 전체주의와 그것에 대한 항거로 점철됐다. 젊은이들을 선동한다고 소크라테스를 독약으로 죽인 그리스 아테네의 시민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를 처형한 중세의 독단적 그리스도교, 유럽의 유대인을 멸종시키려 했던 독일의 나치, 대통령 모독죄라는 항목 까지 만들어 국민들이 숨조차 마음대로 쉴 수 없게 했던 우리의 지난 군사정권들은 자신들과 다른 소리를 흡사 잡초 뽑듯이 제거하려 했는데, 이런 전체주의적 사고야말로 야만성의 특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일련의 사건과 관련해서 더욱 한심스러운 작태는 지성인들에게서 발견된다. 전국 대학 총학장이라는 분들이 흡사 중고등학생들 수학 여행하듯 연세대학교 시위현장을 답사하면서, 이 기회에 학생운동을 초토화시켜야겠다는 정부와 보수언론에게 쌍수로 충성을 맹세했다. 한총련의 부질없는 행동이 누구의 책임인데 그들은 정부와 언론 뒤에 숨어서 학생들에게 돌을 던지는지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그 사건이 그처럼 국가의 운명이 걸릴만한 일이었다면 일차적 책임은 대학교수들과 정부의 교육책임자들에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에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총장 자리를 내놓은 분은 하나도 없고, 한결같이 분을 삭이지 못해 하거나 아니면 단죄의 칼이 어떻게 휘둘러질지 무기력하게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은 군주국가도 아니며 더구나 사이비 종파집단도 아니다. 우리는 반국가적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엄청난 구조적 폭력이 실행되어 왔음을 잘 알고 있다. 많은 경우에 다른 소리와 주장은 우리의 독선에 필요한 제동장치 역할을 한다. 정부, 여야당, 대학당국 모두가 그들을 단칼에 요절내겠다고 두 눈에 불을 키는 건 자신감의 결여에 불과하다.(96.9.1)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