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구원하자!

필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시절에는 라디오도 흔치 않아 동회나 면사무소에서 방송을 받아 집집마다 연결되어 있는 스피커로 보내주곤 했다. 그런 처지이기 때문에 60년대에 시작한 TV방송을 시청한다는 건 아주 특별한 집 식구들이 아니면 아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우리 꼬마들은 혜화동 로터리의 어느 담벼락 위에 올려진 TV를 보기 위해 저녁밥을 먹자마자 달려가곤 했던 기억이 있다. 움직이는 화면으로 그날의 뉴스나 드라마를 본다는 게, 사실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는 참으로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칼라 TV가 없는 집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많이 보급됐으며, 약간의 재정적인 부담을 감수하기만 한다면 CA-TV 뿐만 아니라 위성방송도 받아볼 수 있게 됐다. 그야말로 TV천국을 살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그게 지나쳐서 모두가 TV에 의존적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더구나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에 TV를 더 이상 방치해 두었다가는 TV가 사이비 교주처럼 우리 자녀들의 정신을 송두리 채 빼앗아 버릴지 모른다. 오늘 한국 TV,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나라의 TV채널은 무선으로서 KBS-1, KBS-2, MBC, TBC, EBS가 있고, 유선으로서 30개 가까운 채널이 있다. 유선방송과 EBS(교육방송)는 전문방송국이기 때문에 제쳐놓고, 일단 네 개의 무선방송을 대상으로 논의되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쇼프로그람과 코미디, 그리고 연속극의 비중이 너무 높다는 점이다. 평일에도 아침저녁으로 수백 회 씩 연속되는 드라마가 물량공세 식으로 우리 안방에 밀려들며, 개그맨들의 무기력한 연기로 뒤죽박죽이 된 코미디가 시도 때도 없이 극성을 부린다. 정말 잡동사니를 아무렇게나 진열해 놓은 만물상 같은 쇼프로그람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더구나 별로 유익하지도, 별로 교양을 주지도, 그렇다고 건강한 웃음과 여흥을 불러일으키지도 않는 이런 프로그람이 소위 황금시간대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비극적이다. 예컨대 9월8일 저녁5:00-8:00 프로그람을 잠시 들여다보자. TBC는 <생방송 TV가요20>, <특집 코미디 펀치펀치1,2부>를 방영했고, MBC는 <오늘은 좋은 날>,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KBS-2는 <TV쇼 진품명풍>, <슈퍼선데이1,2부>를, KBS-1은 <바른말 고운말>, <세계명작만화>,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 <열린 음악회>를 방영했다. 8:00-10:00에 모든 방송사가 뉴스와 드라마를, 그리고 방송국에 따라 특집과 쇼를 방송했다. 개중에는 괜찮은 프로그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는 단순히 말초적 신경만 자극할 뿐이다.
왜 이렇게 드라마와 코미디와 쇼프로그람이 우리 TV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는가? 물론 시청률이 높기 때문이다. 얼마 전 통계에 의하면 <목욕탕집 남자들>이 6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하는데, 10위 안에 든 프로그람이 이런 것들이다. 시청자의 수준과 제작진들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서 우리의 TV는 그런 것들만 만들어내고 있다.
둘째로, 프로그람의 질적 수준 미달이 심각하다. 앞서 말한 드라마, 코미디, 쇼가 많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의 천박성 내지 비전문성이 더욱 심각하다. 개그맨들이 등장하는 코미디를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도 않은 우리 집 막내딸이 아주 즐겨본다는 걸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무리 개그맨들이지만 연기인으로서의 전문성을 가져야 하고 아니면 그런 노력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 아무리 잘 봐줘도 그들의 연기는 중고등학생들이 소풍시간에 갖는 오락 정도에 불과하다. 드라마는 또 어떤가? 거의 주부들의 감수성에만 매어달려 줄거리를 엮어가고, 약간 인기가 있다 싶으면 질질 끌어가는 그런 야만성을 도저히 참아내기 힘들다. 과장된 수다를 떠는 일, 해괴한 성격의 묘사, 사건 줄거리의 지나친 비약과 우연성, 연기력의 미숙성 등이 너무 자주 보인다. 쇼프로그람은 한결같이 여중생 정도를 대상으로 만들어진다. 어린 소녀들의 쓸데없는 환호성과 괴성, 현란한 조명과 댄스뮤직 일색이다. 거기다가 젊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를 메주알고주알 떠벌리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셋째, 스포츠 경기 중계가 지나치게 많다. 어느 나라의 TV방송국에서 평일에 프로 야구나 축구를, 그것도 서너 시간 씩 전게임을 중계하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 TV는 툭하면 그렇게 한다. 아마 가장 적게 제작비를 들이고 효과적인 광고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전파의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조심스러워야 한다.
넷째, 우리의 방송은 전체적으로 너무 시끄럽다. 쇼나 코미디뿐만 아니라 드라마도 시끄럽고, 심지어는 어린이 방송도 시끄럽다. 어린이 퀴즈 프로그람을 진행하면서 MC가 왜 그렇게 흥분해서 고함을 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자신만이 아니라 녹화장에 모인 어린이들에게도 역시‘와’하는 고함을 치게 만든다. 어른들의 연예 쇼프로그람이나 토크쇼도 그렇지만, 억지로 박수를 유도한다. 진행자가 할 말이 별로 없으면 “박수를 부탁합니다.”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어디 위에서 지적한 그런 부분만이겠는가? 볼수록 바보가 되는, 그래서 바보상자라 일컬어지는 그 TV를 우리가 구원해 내야 한다. 매우 무신경하게, 그리고 순전히 장사 속으로만 제작된 작품을 시청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의 교만을 들추어내야 한다. 좋은 프로그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능한대로 TV시청을 줄여나가는 것이야말로 TV구원의 첩경이다.(9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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