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공비 소탕작전

금년 8월은 한총련의 광복절 행사와 관련된 연세대 사건이 회오리바람처럼 우리 사회를 휩쓸었고, 9월은 북한 부장간첩 침투사건이 그랬다. 엄청나게 시대가 달라졌는데도 불구하고 대학생들의 투쟁방법이 여전히 폭력적이었고, 북한의 대남전술 역시 지난 7,80년대의 냉전시대 때의 그것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면서 참으로 참담하다 못해 허탈했다.
지난 9월18일 강원도 강릉 앞 바다에 북한무장간첩 25,6명이 타고 내려온 잠수함이 발견됐다. 암초에 좌초돼 꼼짝달싹 못하게 되자 우리 국군의 추격을 받고 칠성 산을 비롯한 태백산맥 줄기로 도망쳤다. 열흘간에 걸친 추격을 통해 1명 생포, 20명 사살, 현재 3명 정도가 도망 중에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도 3명이 죽었고, 민간인 1명이 간첩오인 사격으로 죽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북한이 21세기를 코앞에 둔 이 시점에, 특히 북한 스스로 나진을 비롯한 특별지구에 자유서방의 자본을 끌어들이면서 생존의 자구책을 찾고 있는 마당에 이런 무모한 일을 획책했다는 건 어느 모로 보아도 미련한 짓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그런 도발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내부의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군부의 과격파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여하튼 이런 쓸데없는 일로 인해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개죽음을 당했다는 건 분통이 터질 일이다.
아직 우리는 이 무장공비 남파의 목표가 요인암살인지, 아니면 간첩남파를 위한 통상활동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무력도발이라고 보기에는 그들의 무장이나 위장이 시원치 않았다고 한다. 좌초된 잠수함 부근에서 겉으로 보더라도 수상쩍은 모습을 하고 십여 명의 젊은이들이 어정거렸다는 건 전문적인 위장침투요원이 가져야할 기본적 행동지침에 매우 어긋난 것이었다. 그렇다고 뒤늦게 북한에서 주장하듯이 훈련 중 기관고장으로 좌초한 것으로 보기에는 좌초된 잠수함의 방향이나 육지에 올라온 그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도발적이었다. 아마 간첩을 내려놓거나 아니면 활동하던 간첩을 다시 북으로 송환하러 왔다가 좌초됐다고 보는데 적절할 것 같다.
사실상 간첩활동은 국가 생존적 차원에서 약간 씩 격을 달리하고 있지만, 모든 나라마다 자기들 방식으로 펼치고 있다. 특히 요즘처럼 정보화 시대에는 그런 간첩활동을 통한 정보수집이 승패의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수준에서 간첩활동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남북한처럼 대치하고 있는 나라 사이만이 아니라 같은 우방국 사이에도 역시 그런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지난 25일 미 법무부 대변인은 메릴랜드 주 수이트랜드 소재 미 해군 정보부에서 19년간 정보 분석관으로 근무해온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채건 김(56세)이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무관 백동일 대령에게 군사기밀이 포함된 비밀문건을 넘겨준 혐의로 미연방수사국에 체포되어 기소됐다고 발표했는데, 주미대사관측은 로버트 김의 간첩혐의가 한국대사관과 연루되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한국과 미국처럼 혈맹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들끼리도 간첩을 심어두는 마당에 적대국끼리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필자는 오늘 이번 사건을 정치가나 군사평론가가 아니라 신학자의 눈으로 해석해 보려고 한다. 신학자의 눈이라고 해서 유별난 건 아니지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명파괴 질서의 근원을 파헤쳐 보자는 말이다. 무장공비 20 여명에다가 우리 측 4명을 포함해서 30명에 가까운 생명이, 그들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인데, 산자락에 죽어 나자빠져 있는 TV화면을 보면서 우리는 무얼 생각해야 하는가? 북의 호전성과 무모성을 증오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 보다는 분단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다각적인 분발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우리는 이들의 죽음을 통시적으로 바라보고 민족적 차원에서 풀어가야 한다.
소설가 이호철 씨는 조선일보에 기고한 <아직 까지 이런 짓을>이란 시론에서(96.9.25.) 북한정권의 무모성을 질타하면서, 우리 국군의 죽음만 아니라 무장간첩의 죽음마저 민족적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텔레비전 화면에 비쳐 나오는 11구의 시체들 정경도, 가족을 몽땅 북에다 두고 열아홉 살에 단신 월남해온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한동안 가슴을 지르르하게 하였다. 혹시 아는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 속에 내 친조카가 들어 있는지도. 친조카가 아니라면 혹여 육촌, 팔촌들의 자제들이나 아닌지. 특히 잠수함장 시체에서 나왔다는 새까맣게 탄 옥수수들, 몇 개비 남아 있지 않은 찌그러진 담배갑, 위장한 국군복에 가짜 이름표. 그리고 팬티, 러닝 같은 내의까지도 하나같이 우리 제품이라던가. 그리고 아아, 북에 남아 있을 저들의 가족들. 처자식들. <중략> 그나저나 삼천리금수강산에 단일민족으로 누천년을 살아온 이 나라 이 땅에서 남북 간에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만 하는가. 대대로 착한 우리 백성들을 자나 깨나 이런 끔찍한 환란 속으로 내모는 게 대체 어느 누구란 말인가. 일단은 어느 원점으로 허심탄회하게 돌아와 보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이 지경 까지 이르게 된 그 원점은 그렇다면 대체 어디인가? <후략>”
우리가 한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추석 연휴를 이렇게 즐기고 있는 동안에도 태백산맥 줄기에선 우리 아들들이 쫓고 쫓기는 죽음의 달리기를 계속하고 있다. 저들도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고향의 부모나 형, 누이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이 한을 푸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 96.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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