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정보사회

2천 년 전 사람들과 1천 년 전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에는 별로 큰 차이가 없었다. 1천년의 간격이 있지만 거의 농경사회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도저히 우리가 생각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세상이 변하고 있다. 1900년의 대구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사진으로 본 사람들은 같은 도시라고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백 년 전에 살던 모습을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백 년이 아니라 오십년, 아니 십 년 전과 오늘의 차이도 거의 하늘과 땅 만큼 벌어져 있다. 예컨대 십년 전에 컴퓨터는 소수의 전문가들에만 필요했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일상적으로 대하고 있는 필수품이 되었다. 십년 전과 비교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술의 발전은 그 속성상 하루가 다르게 가속도를 붙여 내달리고 있다. 이 기술발전이 어디 까지 도달하겠는가, 하는 점은 그 어떤 미래학자도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열려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기술능력이 한이 없다는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더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인간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 스스로 자신의 길을 열어 가는데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40억 전 세계 사람들을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는 기술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 그 시기는 그렇게 오래 전이 아니다. 물론 점진적인 발전이야 끊임없이 계속됐지만 본격적인 발전은 18세기 중엽에 시작한 영국의 산업혁명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세상을 농업사회로 부터 산업사회로 변화시킨 이 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시작해서 유럽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 등으로 확산됐고 급기야 아시아를 비롯해서 전 세계에 보편적인 질서와 가치로 자리 잡게 됐다. 그 후 지난 250년 동안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기술발전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해서 모든 힘을 이것에 집중시켰다. 그 결과로 전기, 자동차, 비행기, 핵발전, 각종 가전제품, 의료기술 등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됐다. 이제는 기술, 산업사회라는 말보다는 ‘정보화, 정보사회’라는 말이 보편화되었으며, 더욱 실감나는 말이 됐다. 기술은 이미 모두에게 일반적으로 가능한 세계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정보가 이 세계구조를 지배하는 가치가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도 6.25 전쟁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처참하고 가난하고 저 개발된 국가였다가, 사십 여년 만에 세계 일류국가는 아니라 하더라도 감히 그걸 넘겨볼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 이유는 바로 산업화, 기술 중심의 경제구조 정책에 절대적으로 힘입은 데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자동차 기술, 선박제조기술, 토목공사, 컴퓨터 기술 등은 선진국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기술발전 덕분에, 비록 최근에 무역수지가 적자를 나타내고 있지만, 국가경제의 덩치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고, 대단히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게 되었다. 백화점에 한번 들려본 사람들은 엄청난 물건들을 보고, 물품의 양만이 아니라 그 가격 면에서도 보통 사람들의 기를 죽일 만한데, 우리의 생산능력 내지 소비능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도 기술혁신, 기술발전이라는 세계적 이념에 적극 동참한 까닭에 어느 정도 잘살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내다보는 기술, 정보사회는 우리 인류의 궁극적인 미래, 즉 우리 인간이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공동체인가? 이를 종교적인 언어로 바꿔보면, 기술 중심의 사회는 인간을 구원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된다. 허버트 마르쿠제가 ‘제 일차원적 인간’이란 책에서 분석해 주고 있는 대로, 기술사회가 인간의 비판정신, 진정한 희망, 창조성 등을 파괴하고 그저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만을 따라가는 일차원적 인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인간본질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성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어떤 사회가 인간구원에 가까운 공동체가 될 것인지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않든 간에, 우리에게 유익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기술정보사회는 이제 우리의 선택권에서 벗어나 버렸다는 점이다.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우리는 도저히 떨쳐낼 수 없다. 한번 술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벗어나려 해도 여전히 그것에 종속되고 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기술문명을 전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생명의 차원과 조화될 수 있도록 조정해 나가는 작업이다. 그게 무얼까?
한스 큉은 기술사회 안에서 대안적으로 추구해야할 사회를 가리켜 ‘기술극복의 공동체’(die meta-technologische Gesellschaft)라고 했다. 기술만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기술이 봉사하는 사회라는 말이다. 기술은 윤리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선하게도 혹은 악하게도 사용된다. 문제는 그 기술이 어떤 방향에서 개발되고 사용되는가, 하는 점이다. 큉은 이런 기술극복의 공동체를 희망하면서 “보다 사람다운 노동형태, 보다 긴밀한 자연과의 관계, 보다 균형 있는 사회구조를, 나아가 그야말로 삶을 삶답게 하는 것이면서도 금전적인 가치로 계량될 수 없는 인간가치인 비물질적 욕구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언하고 있는 대로 노동문제, 생태학문제, 사회정의문제는 기술, 정보, 생산성, 수출 등의 문제보다 훨씬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우리의 목표다. 그렇다. 기술이 인간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정의롭게 실현시키는 영적인 힘이 그 일을 한다. (9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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