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감사절 단상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거의 모든 한국교회들이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Thanksgiving-day)은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1년9월6일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아메리카로 가서 일년 만에 가을곡식을 거둬들이게 됐을 때 농사를 도와준 인디안 친구들을 초청하여 추수감사제를 드린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런 유의 추수감사축제는 미국전통만이거나 혹은 기독교전통만도 아닌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전통이다. 왜냐하면 이런 농사와 수확은 인간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주 고대시절 인간은 동굴 같은 곳에 살면서 나무열매를 따먹거나 아니면 약한 동물을 잡아먹으며 살았다. 그러다가 머리가 앞선 어떤 이들이 씨를 뿌리고 재배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또한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여 사용하게도 됐다. 이런 농축생활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그 이전에야 언제 먹을지, 굶을지 모르며 지냈지만 농축생활의 시작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계획할 수 있었다. 생존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인간은 철학과 예술 등이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즉 인간 삶의 본질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결국 인간문명은 농축생활로 인해 생존이 해결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 된다. 특히 농사는 인류 고대로 부터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민족과 종족이 종교적 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농사만이 그 민족과 종족을 계속적으로 살려낼 수 있는 바탕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제의와 축제는 농사와 관련을 맺는데, 구약에 나오는 유대인의 종교적 절기, 예컨대 유월절이나 오순절을 보더라도 농경생활의 전승과 맞물려 있다. 우리나라의 여러 절기를 확인해 봐도 역시 마찬가지다.
추수감사절은 인간생존에 직결되어 있는 전통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런 절기를 교회에서 지킨다고 할 때 다시 한 번 그 부분에 우리의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 고대인들이 매년 마다 가뭄이나 홍수, 혹은 전염병이나 메뚜기 떼의 습격 등 여러 자연재해 가운데서 곡식을 거둬들였을 때 얼마나 감격했을는지는 우리는 조금이라도 들여야 보아야 한다. 풍년보다는 흉년을 더 많이 경험했을 그들이었기 때문에 다음 해 추수 때 까지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는 곡식을 거두어들였을 때 술을 빚고 떡을 하고, 춤과 노래로 즐거워하면서 추수감사축제를 벌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서 치러지는 추수감사절은 어떤가? 거의 형식적인 절차만 남아 있지 생존에 대한 감사가 별로 진지하지 못하다. 필요한 만큼의 헌금, 먹거리, 혹은 사회시설방문 등의 행사를 한다. 학습, 세례를 받거나 혹은 성가발표회를 갖기도 한다. 이런 행사는 일단 좋다. 이런 교회행사가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살려낼 수 있다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고대인들이나 17세기 초의 청교도들이 가졌던 생존에 대한 치열성과 그 환희를 회복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별로 자신감이 없다.
사실은 이런 문제가 교회 안에서만 심각한 건 아니다. 오늘 현대인의 삶 자체가 존재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특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주변 그 어디에서도 추수감사절이 갖는 근본의미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늘 우리는 고대인들이 매일 일상적으로 느끼던 생존의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어느 부족의 추장이나 한 나라의 왕 보다도 오늘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향유하며 산다. 우리나라 정도의 경제수준을 갖는 나라의 보통 사람들이라면 흉년이 들어도 굶어죽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정 안되면 켈리포니아의 값싼 쌀을 수입해다 먹으면 된다. 요즘 신세대라면 “밥이 없으면 라면이나 피자를 먹자.”고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 우리에게는 생존의 위기감이 없다. 우리는 항상 배부르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건 착각이다. 엄청난 착각이다. 아무리 우리가 많은 걸 누려도 생존의 위기는 항상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오늘 우리는 그것에 눈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먹을 게 많다고 해서, 따뜻한 집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풍성한 존재에 참여했다고 말할 수 없다. 고대인들이 알지 못했던 불치병이나 각종 사고 같은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인간이란 아무리 생존의 안전장치를 겹겹이 설치해 놓는다고 해도 그것으로 완전한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 그게 바로 인간의 본질이다.
추수감사절을 단순히 풍년에 대한 감사와 기쁨으로 한정시켜서는 안 된다. 많이 거두고 많이 즐기며 사는 것만이 목표라고 한다면 풍요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현대인은 그야말로 완전한 자리에 도달한 이들이다. 그러나 풍요는 생존의 기초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풍요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지나치게 많이 생산해 내고 찌꺼기를 남기고, 강과 산을 오염시키면서 지구 전체를 쓰레기통으로 만들게 된다. 들리는 말로는 요즘 서울 근방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대충 먹고 버리는 음식물 찌꺼기를 도저히 처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는 한 아무리 풍년이 들어도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 지금 우리의 먹거리 문화는 생존에 대한 환희와 감사가 아니라 자기가 일으켜 세운 업적을 확인하려는 것뿐이다. 추수감사절은 우리의 생존이 하나님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에 대한 철저한 신앙고백임을 기독교인은 잊지 말아야 한다. (9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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