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젊은 죽음

며칠 전 독일의 한 가정주부 오틸리에 샤이크가 쓴 <Du warst wie ein Sonnentag>(박재순역, 너는 햇살처럼 밝았다, 바오로딸 출판사)를 보았다. 158쪽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자였지만 암과 투병하는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눈물 나도록 진하게 전달돼 왔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오틸리에는 아들과 딸 남매를 둔 행복한 가정주부였다. 요제프라는 아들이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기 두 달 전 갑자기 몸에 통증을 느껴 병원에 실려갔고, 진단 결과 악성종양으로 판명 났다. 첫 번 수술 결과 그 암이 지독한 악성종양이라서 다시 좀더 큰 병원에 가서 근원적인 수술을 받게 되었다. 다 큰 아들, 평소에 그렇게 건강하던 아들, 더구나 신앙심이 깊고 개방적이어서 가톨릭 친구들만이 아니라 개신교 친구들과도 폭넓게 신앙적 교제를 나누던, 그리고 기타를 좋아해서 벌써 후배들에게 기타교습을 시키던 싱싱한 젊은 아들이 전혀 생각지 않았던 악성종양에 걸려 이리 저리 병원을 전전하며 수술과 화학요법 치료를 받아야 하는 걸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으리란 건 우리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요제프는 근 2년 동안 투병했다. 나중에는 암세포가 폐에 까지 침투해서 한쪽을 절단해 냈고, 다른 쪽 폐의 많은 부분을 드러내기 까지 했다. 겉으로는 멀쩡해서 친구들과 함께 <암 조기발견기구> 등을 위해 자선음악회를 열고, 휴가를 다니고, 공부를 계속했지만 아들 요세프의 몸은 암세포로 굳어져갔다. 하루 종일 걸리는 수술, 몇 주간에 걸친 방사선치료, 금발이 다 빠져 보기 흉하게 된 머리, 의사의 진찰 결과에 따라 기쁨과 절망이 교차되던 숨 막히는 순간들, 그러나 숨이 끊기기 전 까지는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오틸리에의 가족은 생의 즐거움을 절실하게 나누고자 노력했다. 어머니의 마음은 한시도 편안하지 않았다. 왜 우리 아들이 그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왜 저렇게 시퍼런 나이에 차마 견딜 수 없는 십자가를 져야하는가? 오틸리에는 하나님께 수백 번 하소연을 했다. 그러나 그 아들은 오히려 어머니 보다 의연했다. 짧은 부분을 아래에 인용한다.
<이날부터 네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똑똑한 네가 자신의 건강이 그렇게 악화되고 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네가 늘 반가워했던 네 친구들이 가고 나서 아버지와 네 누이와 나만 네 곁에 남아있던 조용한 저녁에 너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 가족만 있군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제발 저를 속이지 마세요. 저는 이제 어른이고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제 죽음이 멀지 않았지요?” 우리는 순간 온 몸이 뻣뻣이 굳어버린 듯 꼼작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을 해주어야 했다. 네 손을 잡은 내 마음에서는 다시 피가 흘렀다. “그래, 요제프! 상태가 매우 나쁘단다.” 나는 그렇게만 말했다. 차마 네 얼굴을 향해 ‘너는 죽어야 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너는 네 아름다운 푸른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너는 울지도 탄식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다! 조용한 목소리로 너는 이렇게 대답했다. “죽어야 한다면 조용히 죽게 해주세요. 하루하루 더 연장시킨다는 것은 저뿐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 클라우디아 모두에게 너무 힘든 일이에요.” 그 순간에도 너는 우리를 생각했다. 우리의 고통이 좀더 가벼워지기만을 너는 바라고 있었다. 그날부터 정확히 1주일 후에 너는 우리 곁을 떠났다.>
숨이 넘어가는 순간의 덩치 큰 아들 요제프를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처럼 품에 안아준 어머니 오틸리에는 그 아들이 죽었지만 여전히 지금도 자신의 삶에, 그 가정에 햇살처럼 비추며 함께 있음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 세상에는 여러 죽음이 있지만 이 책의 요제프처럼 오랜 시간 죽음과의 투쟁을 거치는, 참으로 처절한 고통의 터널을 지나 결국 죽게 되는 이들을 보게 된다. 교통사고의 죽음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그런 고통은 장기간의 투병에 비해 짧기 때문에 견디기 낫다. 더구나 이런 죽을병과 투쟁하는 이들이 어리거나 젊을 경우 차마 우리는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게 된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이런 죽음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같은 이 땅 위에서 같은 시간에 벌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일상과 투병은 우리 인간에게 전혀 다른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던 그런 죽음과의 몸서리쳐지는 싸움이 자신의 현실로 다가온 다음에야 그런 것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오틸리에도 자기 아들이 누워 있는 중환자실에 가보고서야 죽음과의 투쟁이 바로 인간의 현실인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젊은 죽음은 참으로 인간이 참아낼 수 없는 슬픔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주변에 이런 젊은 죽음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 티브이에 방영된 대로, 미국에 입양되어 미국인 부부에 의해 성장했고, 미 육사 졸업반이었던 한 젊은이가 백혈병과 투쟁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를 살리기 위한 운동이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데, 잘 되기만 바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리고 우리의 가족과 이웃이 이렇게 살아있음을 진정으로 기뻐할 줄 알아야겠다. 오틸리에는 아들의 투병과 죽음을 통해서 단순히 존재하고 있음이 기쁨인 것을, 은총인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죽음에 직면해 있는 아들을 곁에 두고 그녀는 아들의 본질이 아니라 실존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분명히, 얼마나 잘 사는가 보다는 어떻게 존재에 참여하는가, 가 우리 삶의 중심문제다.(96.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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