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죽음과 부활

죽는다는 게 과연 무얼까? 우리 주변에서 죽음을 일상적으로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그 죽음의 정체를 잘 모르고 있으며, 또한 모두가 죽음을 향해 아주 빠르게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문제를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죽음이 너무나 두려워서 그 사실을 잊고 싶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걸 이미 초월했기 때문일까? 이상하게도 죽음은 인간 삶의 중심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현실 너머로 밀려나고 있다. 그러나 인간 삶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해석하는데 죽음이 상수로 작용할 때만 정당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구원론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두 축으로 삼고 있다는 건 기독교의 인간이해가 대단히 바르다는 걸 말한다 하겠다.
예수는 서른세 살의 나이에 그 당시 가장 처참하고 수치스러운 로마처형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형을 당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가 십자가 죽음을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주고 있다. 죽음을 예감한 전날 밤에 고통 가운데서 기도하던 그의 몸에서 흡사 피와 같은 땀이 흘러내렸다고도 하며, 십자가상에서 목마르다는 절규와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는 외침이 있었다고도 한다. 만약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죽음의 고통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초대 교회의 이단이 주장했던 가현설에 빠지는 우를 범하는 게 된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은 죽음과 파멸의 진저리쳐지는 공포를 경험했다. 영웅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죽음에 대한 초연한 태도가 아니라 보통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몸부림이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왜 예수는 그렇게도 죽음을 두려워했는가? 웬만큼 정신적 수양을 한 사람들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사는데, 예수는 왜 죽음 앞에서 그들만큼도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는가? 물론 예수가 정신수련가들 보다 영적인 훈련이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3년 동안의 공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악한 영과 투쟁했으며, 그럴 때 마다 넉넉하게 극복했다. 예수가 자신의 삶에 집착했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쩔쩔맨 것도 아니다. 그는 주변의 모든 이들을 위해 자신을 던져버린 분이셨다. 십자가상에서 당할 육체적 고통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공생애 초기에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육체의 한계에 도달해 보신 분이었으며, 서른 살 까지 목수로 살면서 그런 고통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만한 분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를 통해서 본 예수는 죽음 앞에서 무척이나 힘들어 하셨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 어려운 일이다.
이런 저런 논리나 감정으로 죽음을 극복할 수는 있다. ‘감미로운 죽음아,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죽음은 이 세상의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사이비 종파나 극단적 사상가들이 개인이나 집단으로 자살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들은 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죽음을 예찬하고 기꺼이 죽음에 들어가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공교한 언어로 수식해 보았자 죽음은 죽음이지 그것 이상이 될 수 없다. 죽음을 예찬하는 건 어떤 면에서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다. 아편에 중독되면 이 세상이 모두 장밋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죽음을 달콤한 것으로 여기는 건 바로 정신적으로 아편에 중독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야말로 죽음 앞에서 가장 솔직한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죽음을 낭만적으로, 혹은 투사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전실존의 상실로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그대로의 죽음,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올 수 없는 관문으로서의 죽음 말이다. 예수에게는 죽음이라는 생물학적인 사실,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도 고통이거니와 그 뒤의 세계를 확인할 수 없다는데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부족했다거나 부활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믿음이 있어도 죽음은 모든 걸 파멸시키며, 불확실하게 만들며, 돌이킬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예수에게도 역시 위협적인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의 비밀이 거의 벗겨지다시피 한 오늘도 역시 죽음은 비밀이며 신비며, 인간의 범접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세력이다. 아마 앞으로 생명의 근원에 대한 비밀이 과학적으로 벗겨진다 해도 이 문제만큼은 인간의 손 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생명과 죽음의 경계선을 결코 넘나들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도 죽음을 어떤 사물이나 사 건 처럼 설명할 수 없다. 간혹 어떤 이들이 사후세계를 그림 그리듯이 설명하곤 하지만 그렇게 형상화 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죽음의 세계는 실증이나 논리가 아니라 믿음, 즉 부활에 대한 믿음의 문제다. 복음서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있은 지 삼일 후에 그가 부활했다고 증언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통시적 사건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보는 것처럼 죽음은 바로 새로운 존재양식인 부활에 참여하는 순간이며 사건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신앙의 초석으로 삼는 자들이다. 십자가의 죽음이 어떻게 부활의 능력으로 변할 수 있는지, 역으로 부활의 능력이 어떤 십자가의 죽음을 전제하는지 깊이 생각해야겠다. 4월은 잔인할 뿐만 아니라, ‘껍데기는 가라’고 고함쳐야 할 계절이다. 여전히 죽음의 위협 안에 살아가지만 앞서 그걸 깨뜨리신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9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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