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총선결과를 보고

이번 4.11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139석(지역구121, 전국구18)을, 국민회의는 79석(지역구66, 전국구13)을, 그리고 민주당은 15석(지역구9, 전국구6)을, 자민련은 50석(지역구41, 전국구9)을 차지했다. 그 외 무소속 후보가 당선된 지역이 16곳이다. 신한국당의 선전, 국민회의의 참패, 민주당의 몰락, 자민련의 약진으로 분류되는 이번 총선은 여러 모양의 쟁점이 있긴 했지만 결국은 김영삼 문민정부의 중간평가라는 점에 모아진다 하겠다. 득표 결과만 놓고 평가해 본다면 현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어느 정도 확고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총론적인 평가로서만 이번 총선의 특징을 설명한다는 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몇 가지 관점에서 보다 가까이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뭐니 뭐니 해도 이번 선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미 13대 때부터 나타난 현상이기는 하지만 소위 지역할거주의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대전을 포함한 충청도는 자민련, 광주를 포함한 전라도는 국민회의,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는 신한국당이 거의 매점매석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약간의 변수라면 똑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대구에서는 자민련이, 경북에서는 신한국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라도는 충청도나 경상도 지역 보다 훨씬 단단하게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또 하나의 특징은 초선의원의 대거 당선이라는 점이다. 보도에 의하면 299명의 국회의원 중 46%인 137명이 초선의원으로 당선됐는데, 더구나 이들이 전국 곳곳에서 정치 거물을 물리쳤다. 가장 극적인 경우가 서울 중구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한 박성범 씨의 경우다. 차세대 대권 주자로 각광을 받고 있던 정대철 후보가 그에게 의외로 고배를 마셨다. 박성범 씨는 물로 TV 뉴스 앵커로 활동하다 이번에 처음으로 출마한 사람이다. 같은 정도로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은 경우가 종로구다. 지역구로는 처음으로 출마한 신한국당의 이명박 씨가 종로에서 내리 4선을 한 국민회의 이종찬 씨를 넉넉한 표차로 물리쳤다.
이번 선거는 개개 후보들이나 당선자들만이 아니라 각 정당들의 입지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됐다. 우선 신한국당은 예상 외로 서울과 인천, 그리고 경기와 강원과 경북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 특히 소선구제 하에서 한 번도 야당이 패배한 적이 없었던 서울에서 과반수가 훨씬 넘는 27석을 여당이 꿰찰 수 있었다는 건 일종의 혁명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회창, 박찬종, 이홍구 씨의 영입으로 개혁적 중산층의 표가 집중된 게 아닌가 생각된다.
국민회의는 누구나 예상했던 서울지역에서 압승을 놓쳤다. 더구나 기라성 같은 당 중진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전국구 14번에 배수진을 쳤던 김대중 총재의 국회입성도 물 건너가게 되었다. 제주도를 제외한다 치더라도 부산, 대구, 대전, 강원, 충북, 충남, 경북, 경남에서 국민회의가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는 건 그 어떤 말로도 변명의 여지를 없게 만들었다. 전라도 사람들이 김대중 씨를 일편단심으로 지지하면 할수록 다른 지역에서는 거부감을 일으키게 되는 것 같다.
자민련은 어부지리를 얻은 당이다. 별로 그럴만한 건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충청도 사람들은 김종필 씨의 자민련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더구나 대구의 13석 중에 8석을 쓸어갔다는 건 대구 유권자들의 마음이 매우 미묘했다는 걸 보여준다. 자타가 자민련의 약진을 말하지만, 이 당은 네 당 중에서 가장 지역적 한계를 철저하게 보여주었다. 15석을 겨우 건진 민주당 보다 훨씬 작은 범주에 갇혀 있는 정당이다. 8개 시, 도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했는데, 특히 47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서울에서 단 한명도 당선자를 내지 못했다는 건, 그리고 당선권에 가까이 집입한 후보도 거의 없었다는 건 참으로 처절한 모습이다.
민주당의 실험은 이제 말 그대로 실험으로 끝나 가는 것 같다. 이기택, 김원기, 노무현, 이철, 박계동 등 전국적 명성을 갖고 있던 이들이 줄줄이 사탕 식으로 떨어져 나갔다. 3김 청산, 정직하고 도덕적인 정치를 슬로건으로 내건 민주당이 이런 식으로 쓰라린 아픔을 갖게 된 건 무엇보다도 현실정치인 3김 구도를 뛰어넘을 만한 역량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란 역시 이상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확인시켜주었다.
끝으로 한 가지 문제만 집어보도록 하자. 아주 특이한 결과를 우리는 대구지역에서 보았다. 신한국당 2명, 자민련 8명, 무소속 3명이 이번에 당선됐다. 박준규, 박철언씨를 비롯해서 자민련 후보들이 막강 파워를 자랑한 반면에 신한국당에서는 유성환, 강신성일, 김용태, 윤영탁, 김한규 씨 등 비교적 비중이 큰 인물들마저 고배를 마셨으며, 강재섭씨가 가까스로 당선됐고, 달성의 김석원 씨만 넉넉하게 당선될 정도였다. 대구 유권자들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바르게 민의가 나타난 건지, 아니면 몇몇의 바람몰이에 휘말린 건지 잘 모르겠다. 특히 공직자 재산공개 파문으로 물러난 이가 당선됐고, 슬롯머신 뇌물 사건에 연루돼 실형 선고를 받았던 이가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는 건 대구 사람들의 의리가 그만큼 철저했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의식이 있는 민주시민이라면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의리라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다. 깡패 세계의 의리는 강하면 강할수록 사회를 좀먹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선거라는 게 유권자가 후보자를 심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후보자의 속임수에 유권자들이 농락당하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다. 그래도 이런 걸 통해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다행이라 하겠다. (96.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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