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날을 맞으며

아래는 홍사중씨의 <돌아오지 않은 아들>이란 제목의 글에 실린 내용의 일부다(조선일보96.4.16.). 데이브 겔로웨이라는 문필가가 들려준 이야기라면서 장애자의 날 4월20일을 앞두고 썼다고 한다.
거의 매일 같이 파티와 사교모임을 즐기는 미국의 한 상류층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침실이 여섯개나 있는 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날도 그들은 저녁파티에 참석할 준비에 들떠 있었다. 막 집을 나가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그것은 뜻밖에도 월남전에 참가한 아들 전화였다. <어머니, 나는 방금 제대하여 본국에 돌왔습니다.> <그것참 잘됐다. 언제 집에 돌아올 수 있느냐?>고 어머니가 기쁨에 넘치는 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그런데 집에 내 전우 한명을 데리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아무렴 여부가 있니, 며칠 동안이든 네 친구를 데리고 오렴.> 이렇게 주저없이 어머니가 승낙했다. <어머니, 그런데 제 친구는 두 다리가 절단되고 팔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굴도 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귀 하나와 눈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보기가 매우 흉한데 정양할 집이 없습니다.> <집이라니? 며칠 동안이라면 우리 집에서 푹 쉬라면 되지 않겠니.> 아들은 어머니에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는 제 말 뜻을 못 알아 들었어요. 나는 그가 영 우리 집에서 살도록 하고 싶단 말이에요.> 우아하고 교양 있는 그 어머니는 이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황급히 아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말도 안 돼. 네 친구의 딱한 사정은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에 마냥 있게 한다면 내 친구들은 뭐라고들 말할 것이며 동네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것 같으냐. 그리고 또 네 아버지 체면은 어떻게 되고. 마침 연휴도 다가왔는데 그냥 너만 빨리 집에 돌아와서 우리 함께 오래간만에 휴일을 즐기도록 하자. 얘야, 내 말 들리니?> 그러나 어머니의 말이 끝나기 전에 아들이 수화기를 놓았는지 전화는 끊겼다. 그날 밤 늦게 부부가 파티에서 돌아와 보니 캘리포니아의 어느 작은 마을 경찰서에서 온 전화 메시지기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한 예감이 든 어머니는 급히 장거리 전화를 걸고 그 마을 경찰서장을 찾았다. <여기 두 다리와 한쪽 팔이 없고 얼굴에 심한 화상이 있고 눈 하나와 귀 하나가 없는 청년의 시체가 있습니다. 그는 머리에 총을 쏘아 자살한 듯합니다. 그런데 그의 신원증명서를 보니 당신의 아드님인 것 같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글은 매우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심리적으로 볼 때 우리 모든 일반에게 적용될 만한 이야기다. 장애자를 향한 우리의 심리와 태도가 어떤가, 그것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겉으로는 박애정신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닥치게 되면 철저하게 실리적인 방향으로 치우치게 된다는 말이다. 지체장애자 시설이 들어오려는 걸 동네 사람들이 결사반대하는 경우가 많은 걸 보아도 그런 걸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런 이중성으로 인해 우리 주변의 장애자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
장애인 문제는 어디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야 할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장애문제에 대한 관점을 바르게 정립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장애인을 정상인에 비해 무언가 부끄럽고 열등한 존재로 생각하고, 가능한대로 이런 장애인으로 부터 멀어지려고 하였다. 장애인을 향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경우라도 그들을 동정할 뿐이지 장애 자체에 대해서는 저주스런 그 무엇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소위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장애는 단순히 장애일 뿐이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정신이 장애이건, 몸이 장애이건 이런 장애인들은 정상인과 일부분에서 다를 뿐이지 열등한 건 아니다. 예컨대 선천적으로 정신박약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대개 자립할 수 없을 정도로 지능이 모자란 사람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는 흡사 어린 아이들도 인간인 것과 같다. 정상적인 성인들의 기준으로만 사람을 보지 말고 각기의 처한 위치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아이는 아이의 기준으로, 자폐증 환자는 그런 기준으로 보아야하지 모두를 똘똘한 사람들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의 관점에서 장애인들을 바라본다면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정상인들이다. 선천적이었든, 후천적이었든 장애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정상인들과 다른 조건 가운데서 살아갈 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장애란 어떤 개인만이 아니라 인간 전체가 갖고 살아가야 할 공동의 짐이라는 점을 좀더 확고하게 해야 한다. 장애를 가진 본인이나 그 가족에게만 불행이 아니라 그 사회 공동체 전체가 떠맡아야 할 숙제라는 말이다. 장애인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는 건 엄청난 수고가 따르게 되는데, 무슨 이유로 그 당사자나 그 가족만 희생해야 하는가? 모두의 아픔이고, 모두의 불행이고,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장애문제에 접근하게 된다면 모든 사회제도나 구조를 장애인 중심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정상인과 별 차이 없이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건 경제원리가 아니라 인간본질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상인을 위한 것 보다 훨씬 많이 투자해야 한다. 도로, 건물, 의료, 직업, 그리고 취미생활에 이르기 까지 장애인들이 불편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
장애문제는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바로 우리 코앞에 닥치게 된다.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로 알고 진지하게 힘을 모아가야겠다.(96.4.21)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