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 대한 질문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된 점이 있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제기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먹고, 입고, 후손을 생산하고, 좀더 나아가서 사회성이나 집단 안에서의 권력에 대한 의지 같은 속성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동물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 인간과 비교해 볼 때 약간 정도의 차이를 보일 뿐이지 개미나 침팬지나 얼룩말 등도 역시 나름대로 생존법칙에 매우 민감하다. 이런 것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이 이 세상에 생존하기 위해 선천적으로 주어진 본능에 속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동물들은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일단 열등하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인간의 관점에서만 평가해서 그들에게 그런 의식이 없다고 단정한다는 게 위험할 수 있긴 하지만 인간의 자기의식에 비해 그들의 그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는 이런 독특한 자기의식이라 것은 어떤 대상과 자신을 분리시켜 생각하고 주변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하게 인식해 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대상과 자신의 분리라는 이런 자기의식은 대개 사춘기에 이르러서 형성된다. 그 이전 까지는 자기와 주변 사람이나 어떤 주변 사물과의 뚜렷한 경계선을 구분해 내지 못하고 세계를 자신과 무의식적으로 동일시 할 뿐이다. 어린 아이들이 남의 물건을 자기 것처럼 가져가는 행위도 사실은 자신과 주변 사물이 동일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춘기가 되면 자기에 대한 의식이 투철하게 되어 이때 까지 자신과 일치되어 있던 부모나 형제로 부터 의식적인 구분이 시작된다. 부모도 역시 자기 자신과는 다른 어떤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절대선(絶對善)이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추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춘기 때 정서적으로 불안하다는 건 확실했던 모든 주변 세계가 그렇지 못하다는 걸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적 불안의 과정은 한 인간을 유년에서 성인으로 변화시켜 주는 힘으로 작용한다. 철저하게 부정하고, 철저하게 의심하고, 철저하게 반항하면서 자신의 정신적 독립성을 키우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이들이 바로 ‘마마보이’다. 이들은 어머니의 품에서 결코 떠나지 못하고, 따라서 의식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세상을 계속적으로 소년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위에서 언급한 자기의식의 문제는 사춘기 때 겪게 되는 일종의 순간적 정신현상으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을 때 까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근거며 이유가 된다. 우리는 계속 ‘나는 누구인가’, ‘나의 삶은 무슨 이유가 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하며, 정신적 불안과 존재의 위기를 경험해야만 한다. 이런 자기의식을 포기할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삶에서 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제2의 유년기로 돌아선 것 같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갖지 못하는 유년 시절로 돌아갔다는 말이다. 부모의 품안에서 세계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단순히 충동적으로 살아가던 유년기 때처럼 현대인은 정보사회가 제공하는 안락함과 풍요라는 새로운 형태의 부모를 모시고 생각 없이 살아간다. 어렸을 때 보모가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므로 부모가 하나님처럼 생각되었듯이 현대인은 자신들의 삶을 책임진 물질문명을 하나님처럼 믿고 살아간다. 이런 신을 갖고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질 수 없다. 그저 주어진 삶을 순간순간 받아들이고 가능한대로 재미있게 살아가면 그뿐이다.
데카르트가 남긴 가장 유명한 명제는 <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다. 그에 의해 서양 철학사는 주관주의적 세계이해에 도달하게 되었고, 급기야 20세기를 사로잡았던 실존주의 철학을 꽃피우게 되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지만 그걸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과 그 의식만은 참된 진리라는 면에서 세계를 주관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주장이다. 데카르트의 주관성과 헤겔의 객관성이 어떻게 상호적으로 서양사를 관통하고 있는지, 그리고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런 주객도식을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 자리에서 더 이상 왈가왈부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다만 데카르트가 이미 5백 년 전에 주창한 주관성, 자기의식은 어떤 시대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참된 세계이해에 이르게 만드는 사유방법론이라는 점만을 지적하면 충분하다.
자기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며 산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데카르트가 말한 대로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찾아가는 작업이다. 이는 곧 존재의 근거를 사유에 두는 것인데, 일상적인 말로 바꾼다면 삶 자체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자세를 가리킨다. 그냥 살아가는 것과 삶 자체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삶 자체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모든 삶의 행위가 갖는 의미와 본질을 생각하는 것이다. 먹는 행위를 놓고 그것이 무언지, 직업 활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과연 전체 생명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자녀를 키우면서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나 가정교육의 본질이 무언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삶은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에 매우 분부하게 쫓아다닐 뿐이지, 그것의 본질에 대한 생각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여당과 야당이 별로 뚜렷한 명분도 없이 싸우고, 한의사와 약사들이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하면서 체면 없이 머리통 터져라 싸우고 있다. 그저 남보다 잘사는 것에만 머리를 쓰지 그 삶 자체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탓이다. (96.5.19)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