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퇴치의 해

유엔에서 금년을 <빈곤퇴치의 해>로 정했다고 하는데, 앞으로 대망의 21세기가 4년 밖에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 이런 슬로건을 정했다는 건 이 시대가 얼마나 처절하고 절박하고 무력한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준다고 하겠다. 오늘의 이 시대는 로마인들이 누렸던 것 보다 훨씬 광범위한 풍요를 구가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절대빈곤층의 증대라는 이상한 현상 가운데 놓여 있다. 2천 년 전에 비해 수백 배, 혹은 수천 배의 생산력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빈곤문제는 그냥 더 이상 방치해 둘 수 없어서, 지구적인 차원에서 매우 절실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절대빈곤은 여러 모로 인간을 파괴시킨다. 경제적 여유가 없으니까 교육을 충분히 시킬 수 없고, 교육을 못 받은 젊은이들은 또 다시 불리한 생활 조건 가운데서 살아가게 된다. 이들은 현대 문명의 이기들로 부터도 역시 밀려나고, 의료의 도움도 충분히 받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절대빈곤층 사람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어려움은 굶주림이 아닐까 생각된다. 먹지 못하면 당장 죽게 되고, 먹는다 해도 영양이 충분하지 못하면 체력이 약해져서 질병에 감염되기도 쉽다.
지금처럼 먹을 게 지천으로 깔려 있는 세상에서 굶주림의 이야기는 무의미하고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없을지 모르겠다. 사실 얼핏 보면 이 세상은 그렇다. 슈퍼마켓에 들어가 보면 먹을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무뎌서 그렇지 여전히 굶주림에 직면해서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
<절대빈곤>의 척도는 지난 1990년 세계은행이 정한 연 개인소득 3백70달러에 못 미치는 것을 말한다. 어림잡아 30만 원 정도다. 우리나라가 얼마 있지 않으면 1만 달러에 도달한다고 하는데 이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인지 알만 하다. 이런 절대빈곤 층이 지난 90년에 11억 명이었는데, 현재는 15억 명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온 세계가 경제적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절대빈곤 층, 말하자면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이들의 숫자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는 건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매분 47명의 어린이와 매년 2천5백만 명의 극빈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세계인구의 20%가 하루 1달러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나고 있다고 한다.
절대빈곤 층은 저개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숫자가 적다뿐이지 선진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 주로 종교단체에서 실시하는 일인데, 결식자들을 위해 매일 한 끼의 식사를 거의 무료로 제공하는 곳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여럿 있다. 그런 곳에 오시는 분들은 대개 독거노인들이거나 부랑자들이어서, 이렇게 따뜻한 한 끼 식사에 생명을 걸어놓고 살아간다. 우리 주변에는 굶주림과 매일 싸우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유엔이 금년도의 주제로 삼고 있는 빈곤퇴치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본질적으로 나눔의 문제다.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 30%에 가까운 이들이 절대빈곤 층에 속한다는 사실, 그리고 1억 명에 이르는 15세 이하의 소년 소녀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지구가 생산해 내는 소산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나눔이 이루어지지 않는데 연유한다. 만약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자기 소유의 일정 부분을, 혹은 소비하고 남는 부분들을 극빈한 나라 사람들에게 보내주기만 한다면 대단히 많은 굶주림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잘 아는 대로 미국이나 프랑스 개들이 먹어대는 통조림 소고기만 절약하더라도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의 영양실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일부분의 인간은 선진국에서 태어난 개만도 못한 실정이라는 말이다.
나눔을 삶의 기초로 삼지 않는 인간이나 사회는 아무리 절대적인 생산량을 높일 수 있다 하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탐욕은 그 어떤 보상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악한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체제는 생산성 제고라는 면에서 다이내믹을 갖고 있지만 나눔이라는 점에서는 철저하게 무기력하다. 자본이 절대이념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재물과 자본을 모으려고만 했지만 그걸 나눌 줄은 모른다. 물론 어느 정도 사적인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죄는 아니겠지만 우리의 체제는 그게 지나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지난 연말에 우리의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 수감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들이 행한 다른 일은 접어두더라도 야비하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수천억 원의 비자금을 긁어모았고, 그 중에 천억, 이천 억 원씩 개인이 착복했으며,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가족, 사돈, 친인척 이름으로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숨겨놓고, 퇴임한 후에 계속해서 교묘하게 관리했다는 건 그들 개인의 인간성 문제로만 돌리기에는 너무 파렴치했다. 더구나 사건이 드러난 후에도 별로 참회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그들의 후안무치는 우리 체제가 갖고 있는 탐욕성의 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나눔이 아니라 소유에 대한 집착으로 구성된 가치관과 사회 구조 속에서는, 아무리 GNP 1만 달라, 아니 2만 달라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삶의 질은 하수구만도 못할 것이다. 빈곤문제,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파생되는 비인간적 문제는 그 당사자만의 책임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빈곤퇴치의 해를 맞아 우리 삶의 모습을 뒤돌아보자. <9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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