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운동 77 주년

반만 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키며 극동의 독특한 문화유산을 꽃피웠던 한민족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던 20세기 초 일본에 의해 36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치욕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 당시 일본의 지배논리와 지배체제가 얼마나 완벽했기에 우리가 한 세대 이상 그처럼 철저하게 종속당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 도처에 힘이 약했던 나라들은 한결같이 18,19세기 세계열강의 제국주의적 무력 앞에서 유린당했지만 우리가 일본에게 당한 건 억울하기 짝이 없다. 식민통치라는 건 양 나라의 국력이 엄청나게 차이가 날 때 가능한데,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걷고 있던 18,19세기에 우리가 적절하게 대처하기 못했고, 신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집스럽게 쇄국정책을 폈으며, 한편으로는 동학운동과 같은 국내의 민족주의적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군대를 불러오는 등 정치지도자들의 역사의식 결여로 인해 국력이 쇠락해졌다 하더라도 식민 지배를 받을 만큼은 아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안방을 송두리째 내줄 수밖에 없었다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여하튼 우리의 운명이 비참해지게 된 건 여러 국내외적 요인들이 있긴 하겠지만 확고한 줏대를 보여주지 못한 왕실과 몇몇 친일주의자들의 잘못된 정치판단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런데 한일합방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었다 치더라도, 36년 동안이나 그대로 자신들의 운명을 감수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얼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마당에서도 매우 많은 조선 지도자들이 황국신민을 부르짖었고, 아들을 전쟁터로, 딸을 정조대로 보내고 있었다는 걸 보면 그들에게 독립의 의지나 희망이 별로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약간 말이 옆으로 흐르는 감이 있지만, 만약 우리의 독립투쟁이 보다 확고해서 그런 사실들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면 해방 후 남북분단이란 건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다 할 가시적 성과 없이 진행된 독립투쟁이었기에, 남이 가져다 준 해방이었기에, 전승국들이 조선의 독립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흡사 연못가에서 돌 던지는 아이들의 장난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는 말처럼, 지금 까지 한민족의 분단운명이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한일합방이 된 지 9년 쯤 지난 1919년 3월1일 삼일운동이 일어났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며, 최소한의 체면치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1919년 1월 일제가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불거지면서 반일정서가 한반도 안에 확산되기 시작했고, 미주나 상해, 그리고 도쿄 등지의 독립운동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종교계 지도급 인사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기운이 싹트게 되었고, 결국 그 일환으로 독립선언서가 작성되었다. 기독교계에서 이승훈, 천도교계에서 손병희, 불교계에서 한용운 등이 준비한 독립선언문은 2월27일에 인쇄되어 종교교단을 중심으로 배포되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많은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걸 예상해 고종인산일인 3월1일 종로의 파고다 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었지만, 군중이 모이게 되면 폭력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일방적으로 장소를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으로 옮겨서 거행했으며, 파고다 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군중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시위했다. 삼일운동은 이날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으며, 두 달 정도에 걸쳐 후속적 시위가 계속됐다. 삼일운동으로 실질적인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국내적으로 일제의 폭압적 무단정치가 종식되고 유화적 문화통치로 바뀌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국외적으로는 중국 등 아시아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은 그렇게 거국적인 독립운동이었던 삼일운동이 겨우 두 달여에 걸친 시위로 끝났으며, 그 이후 일본이 미국의 핵폭탄 세례를 받고 무조건 항복한 45년 까지 26년 동안 왜 주눅 들어 지냈는가 하는 것이다. 자료에 의하면 삼일운동 시위횟수는 폭력과 비폭력을 합해 3,4월에 걸쳐 1,188회가 발생했으며, 3-5월 중 입감자는 8,511명이었다. 이처럼 거국적인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운동을 이끌어 갈만한 조직이 없었다는 점과 그나마 있는 지도층이 지나칠 정도로 일제에 타협적인 자세를 보인 점 등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문제가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이 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는 것, 특히 그 시대 관료들이나 여러 지도층 인사들의 방관 내지 반대가 심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생명을 내걸고 항일투쟁을 한 이들도 적지 않았지만 오히려 일제에 빌붙어 잘 지내보려한 이들이 훨씬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우리들 중에서도 그런 감상에 젖어 있는 이들이 있지만, 일본 때문에 우리가 이 정도라도 발전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식민통치를 합리화 시켜주던 이들이, 노골적으로는 친일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심정적으로 동의한 이들이 태반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간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죽은 듯이 무력하게 지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천성적으로 이성적이거나 의지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인 성향이 강하다. 요즘 일본정치인들의 독도망언으로 시끄러운데, 이에 대한 대처가 한 순간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로 끝나버린다면 삼일운동처럼 상징적 사건에 머물고 만다. 한민족의 역사는 호들갑이 아니라 부단한 의식의 결집으로만 자리를 잡아나갈 수 있다. (96.3.3)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