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살기

주 5일 근무 업체가 늘어나는 걸 보니 그만큼 우리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졌나보다. 이는 곧 언제부턴가 대통령 이하 공직자들과 경제인들, 이 사회에서 어느 정도 말발을 내세우는 이들의 입에 주문처럼 따라다니는, 소위 개인소득 일만 불 시대가 우리 코앞에 닥쳤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런 정도나마 주름살을 필수 있었던 건 일제통치 36년의 수탈과 피눈물 나는 육이오 전쟁의 참화를 이겨낸 우리 어른들의 처절한, 생존을 향한 몸짓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참으로 우리는 지난 30년 동안 좌우 살피지 않고 앞만 보고 줄달음치며 살아왔다. 밤을 낮처럼 여기고 물불 가리지 않고 기계처럼 일했다. 그런 피눈물 나는 투쟁으로 이제는 우리 대통령이 선진국 정상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자신만만하게 할 소리를 하게 되었다.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이처럼 복지국가 운운하게 된 걸 보면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보는 것 같다. 세계 그 어느 민족들보다도 근면성실한 사람들, 마음을 먹었다 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성취하고야 마는 집념의 사람들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자식교육에 헌신적인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었다.
그런데 멋진 민족이긴 하지만 한 가지 못된 습성을 갖고 있다. 그게 선천적이라기보다는 가난을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의 시기에 몸에 젖어 아예 천성처럼 되어 버린 조급증이다. 남보다 빨리 어떤 목표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무슨 일을 하든지 <빨리, 빨리> 하려고만 한다. 다른 사람 보다 일을 빨리 했다는 건 칭찬받을 만한 일이지만 일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빨리 하려는 마음이 앞서게 되어서 결국 부실하게 일을 끝내게 된다. 최근에 발생한 크고 작은 사고들은 거의 모두가 이런 조급증과 지나친 목표지향성 때문에 빚어졌다고 보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굶어 죽던 시절에야 어떻게 해서라도 빨리 많은 걸 생산해서 그 위기를 모면해야겠지만, 최소한 생존이 보장된 시기에도 역시 그런 생활습관을 버리지 않는 게 큰 문제다.
몇 년 전 재계에서는 <시테크>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시간 관리야말로 개인이나 어느 집단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지름길이라는 주장이다. 기술이나 자본은 노력 여하에 따라 보충될 수 있지만, 시간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시간의 효용성을 극대화 해야만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회사원들이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짧은 시간 까지 돈으로 계산하고, 더욱이 초단위로 생각해야만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외쳐댔다.
과연 인간이 시간을 관리할 수 있는 걸까? 몇 분, 몇 초 단위로 시간을 관리하는 게 시간을 극복하는 길일까? 분명한 건 시간은 인간에 의해 관리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인간이 시간으로 부터 자유하지 못할 뿐이다. 숨 쉴 틈조차 아깝게 생각하면서 더 많은 생산을 올렸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 시간이 확장된 것일까? 이건 엄청난 난센스다. 인간이 무얼 얼마나 생산해 냈든지 시간은 그저 자기 의지대로, 혹은 자기 질서에 따라 흘러갈 뿐이지 어떤 특정인에게만 특혜를 주지 않는다. 아등바등 대면서 자동차를 많이 생산한 사람에게나 쉬어가며 작은 밭농사를 지은 사람에게나 한 시간은 그저 한 시간일 뿐이지 길고 짧고의 차이는 있을 수 없다.
물론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자는 원론적 입장에 대해 괴변으로 대항하자는 뜻은 추호도 없다. 다만 지나친 시간관리가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허물어뜨리게 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코자 할 뿐이다. 지난 날,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가 걸어가는 길이 근본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하고 거의 맹목적이다 할 정도로 성취지향주의에 기초한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이런 현상이 그저 경제적 성과를 올려야하는 기업체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예컨대 가장 진리론적 기초가 명확해야 할 대학사회 마저도 그렇다. 대학이 너무 어수선하고 무언가 쫓기는 분위기다. 대통령이 <세계화>라는 담론을 다분히 정치적 배경을 깔고 던지자, 대학인들이 뒤질세라 대학의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는 모습은 애처롭기조차 하다. 대학 발전기금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모금하고, 교수들을 몇 가지 평가기준으로 몰아친다. 신입생 모집문제만 하더라도 백년지대계의 긴 안목을 갖고 실시하는 게 아니라 당장 그 한해에 좋은 학생을 한명이라도 더 끌어오려고 졸속으로 제도를 바꾸곤 한다. 이렇듯 대학이 흡사 고등학교 같이 타율적인 질서로 흘러가고 있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라도 빨리 좋은 대학이라는 명성을 얻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교회는 어떤가? 사회 보다 더 하면 더 했지 조금도 덜 하지 않다는 게 우리의 솔직한 고백이다. 교회의 조급증은 사회 보다 한수 위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 곳인데, 이와는 반대로 신자들이 시달림을 받는 곳처럼 되었다. 일 년 내도록 무언가 사업을 펼치지 않으면 죽은 교회처럼 생각하고 충분한 검토 없이, 혹은 당장의 효과를 위해 지나치게 많은 이벤트성 사업을 펼친다.
우리 사회는 중국 속담에 나오듯이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이다. 신나게 달릴 때는 기분이 좋지만 마음대로 내려올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뒤를 돌아다 볼 틈도 없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최소한의 생각도 없이 무작정 빠르게 달려만 왔고, 지금도 그렇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느리게 살기>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 느리게 사는 건 인생의 패배주의가 아니라, 인생의 승패를 떠나는 초월의 자세다. (9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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