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천억 원과 대통령

한 달 여 쯤 전, 전직 대통령의 한 측근이 가, 차명 예금 4천억 원의 실명전환을 도와주면 그 중에 반을 뚝 떼어 현 정부에 기부하겠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서석재 총무처 장관이 신문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발설했다가 며칠 만에 장관자리에서 쫓겨났다. 매스컴에서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검찰은 자신들이 나설만한 일이 아니라고 버티다가 국민들의 의혹이 비등하고, 이에 적극 대응해야겠다고 생각한 정부 측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수사에 착수한 결과 “풍문이 와전” 된 것으로 결론을 맺었다. 일종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참으로 웃기는 나라다. 일국의 총무처 장관이란 인사가 사실 확인도 없이 별로 신용할 수 없는 이들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것도 아주 미묘한 이야기를 은근슬쩍 매스컴에 알려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질 정도로 소란스럽게 만드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 그렇게 인물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더 심각한 건 국민 대다수가 검찰의 수사발표를 믿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미 수사 초기부터 각본수사라느니, 발 빼기 수사라느니, 여론무마용이라는 말들이 많았다. 그런 예상대로 검찰은 4천억 설을 퍼트린 예닐곱 명의 신원을 확보하여 단호한 수사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더니, 흡사 코미디처럼 카지노 자금과 관계된 낭설이 확대되었을 뿐이라고 발표했고, 국민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시큰둥하게 받아들였다.
전직 대통령이 마음만 먹는다면 재직 중에 4천억 원 정도의 돈을 꿍쳐둘 수 있었을까? 사리를 분간할 수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 중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다. 이정도로 대통령직은 백성들에게 무소불위의 직으로, 혹은 불신의 직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뜻이라 하겠다. 이런 국민들의 정서를 의식해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일절 정치자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는지 모른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은 돈을 많이 썼다. 국회의원들에게 절기 때마다 떡값으로 수백만 원이나 수천만 원 씩, 군 수뇌급 인사나 장차관과 청와대 간부직원들의 전별금으로 수 억원 씩 썼다. 비정상적으로 뿌려야 할 돈이 필요하다 보니 당연히 비정상적으로 정치자금을 모았다. 5공 청문회 때 밝혀진 바로는 전두환 씨는 일해재단 성금을 비롯하여 2천6백59억 원을 거두어들이는 등 7천억 원의 통치자금을 거둔 것으로 추산된다. 정주영 씨는 5공만이 아니라 노태우시의 6공 때도 매년 1백억 원씩 3백억 원 이상을 제공했다고 증언한 일이 있는데, 그렇다면 다른 기업가들도 마찬가지였음이 불문가지다.
정치자금 이외에 이권과 관계된 뇌물이 엄청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한국군의 현대화 사업인 율곡사업만 하더라도 정가 보다 비싼 값으로 무기를 사들여 오고 그 차액을 커미션으로 받아 챙기는 수법은 아주 고전적이다. 수 조원의 사업에 10%만 커미션으로 챙겨도 그 액수는 천문학적이다. 원자력 발전소 사업이나 골프장 허가, 고속전철 기종선정, 영종도 신공항 건설 주사업자 선정 등 모든 국가사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는 정말 짜증스럽다. 듣기도 싫고, 믿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사실에 가깝다는 점에서 분통이 터진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88년11월23일 백담사로 유배를 떠나면서 “정치자금 문제는 뜻대로 만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특히 집권여당의 총재로서 정당을 유지하고 선거를 치르자면 적지 않은 정치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고 밝히면서 사용하다 남은 1백39억 원을 국가에 헌납했다. 그가 토로한 아주 작은 진실 속에서도, 그것은 더 큰 위선의 한쪽 면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엄청난 정치자금의 흔적을 조금 알아챌 수 있었다. 물론 합법적인 정치자금이야 당연히 권장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음성적이고 불법적이고, 그리고 지나치게 크다는 데 문제가 있다. 도대체가 어느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기에 한 기업가가 일 년에 백억 원씩 정치자금으로 기부할 수 있겠는가?
이번의 4천억 원이 아니라 하드라도, 이미 드러난, 그리고 그렇게 추정되는 부분만으로도 전직 대통령 두 분이 무지하게 많은 부정한 돈을 긁어모았음이 분명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그분들이 당근과 채찍으로 적당하게 경제인들을 몰아쳐서 정치자금을 모았고, 또한 자기 세력을 불리기 위해 이곳저곳에 그 돈을 뿌려댔다면 이건 깡패세계와 별로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분들이 겉으로는 분골쇄신 국가에 충성하고 백성들을 섬기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속으로는 온갖 불법을 일삼았다는 걸 생각하면 참으로 화가 치민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모든 국가적 차원의 문제들을 무한 책임지는 직책이다. 그만큼 영광스럽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선 사람이라면 그런 직위에 걸 맞는 삶의 무게를 지녀야 한다. 아무나 탱크를 몰고 들이닥쳐 권력을 찬탈하고, 대통령 자리에 앉아서 한 나라를 통치한다면 그건 민주국가가 아니다. 태국 수도 방콕 시장이었던 잠롱 처럼 수도승 내지 청교도 같은 청렴성은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정경유착의 장본인으로 지목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았을까.
4천억 원은 만 원짜리 지폐로 4t 트럭 10대분이라고 한다. 엄청난 돈이 전직 대통령과 연관되어 유언비어로 퍼졌다는 건 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 있음을 뜻한다. 적당하게 4천억 원 건을 얼버무린 정부나, 얼마 가지 않아 그런 사실들을 쉽게 잊어버리는 우리 백성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지 모른다. <95.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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