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박경리 여사는 지난 해 한국 소설문학의 금자탑이라 해도 좋을만한 <토지>를 20여년에 걸친 노고 끝에 완간했다. 엄청난 일을 해내신 분이다. 이에 앞서 <김약국의 딸>-이하 <김약국>-이란 작품이 1993년도 초에 발행됐다. <토지>가 대하소설로서 근대 한국사를 배경으로 민중들과 그들의 삶을 장엄하게 그려주고 있는 반면에, <김약국>은 <토지>에 비해 간단 소박한 구성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박경리 여사의 인간을 이해하는 작가적 통찰력과 분석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외간 남자를 만나 서방질을 했다는 남편의 오해를 받고 음독자살한 어머니와, 과거에 아내를 짝사랑하던 남자를 때려죽이고 가출하여 평생 고향을 찾아오지 못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난데없이 고아가 된 김성수는 아들이 없던 큰 아버지의 양자가 된다. 큰 아버지로 부터 많은 토지와 한약국을 물려받은 김성수(김약국으로 불림)는 다섯 딸을 두게 된다. 첫째인 용숙은 열일곱 살 때 출가했으나 아이 하나를 낳았을 때 남편이 죽어 젊은 과부로 살다가 자기 아이를 치료하던 의사와 정분이 나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음 씀씀이도 아주 인색한 여자다. 둘째인 용빈은 다섯 딸 중에서 아버지의 마음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딸로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셋째인 용란은 처녀 때 부터 <끼>가 많아서 머슴과 정을 통하다가 아버지에게 들통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부끄러워 할 줄 모르고 지내다가 어떤 아편쟁이와 결혼한 후 미쳐버린다. 넷째인 용옥은 외모가 형편없지만 기독교 신앙이 돈독한 여자로서 셋째 언니를 짝사랑하던 남자와 혼인했는데 부산에서 통영으로 오는 배를 탔다가 난파하여 죽는다. 다섯째인 용혜는 어렸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별로 이렇다 할 역할이 없는 막내딸인데, 사람들은 용혜를 김약국의 친 아버지와 닮았다고 말하지만 김약국은 막내를 볼 때 마다 자기가 마음을 주었던, 폐병으로 일찍 죽은 사촌 누나인 연순을 연상했다.
이들 다섯 딸들은 거의 한결같이 불행했다. 이 딸들의 이어지는 불행은 흡사 김약국의 해양업 사업이 몰락해 가는 과정과 비슷했다. 김약국은 약국을 그만두고 어장을 경영하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큰 빚을 내 화력선 두 척을 사서 멀리 까지 나가 고기를 잡으려고 했다. 김약국이 어업에 관심이 많다거나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걸 넷째 사위에게 맡겨둔 상태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태풍을 만나 한척은 실종되고 한척만 겨우 돌아왔는데, 이로 인해 모든 재산을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아편쟁이 셋째 사위의 도끼에 맞아 죽었다. 김약국은 말년에 절망과 고독을 안고 살다가 결국 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김약국>은 가슴이 저릴 정도로 한과 슬픔이 배어 있는 소설이다. 대지주요, 사업가 가정이 그렇게 처절하게 허물러져 내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독자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욕심이 없지만 강직했던 김약국의 몰락은 바로 한민족의 운명과 비슷했다. 김약국의 캐릭터가 바로 우리의 민족성과 일치했다. 순박하면서도 소심한, 남에게 피해를 주기보다는 시련과 고통을 자기가 감수하려는 그런 생각들이다. 속으로는 사실 약하면서도 겉으로는 강하게 보이려고 발버둥 치다가, 여러 숙명적인 사건들과 어우러져 결국 비통하게 죽음을 맞는다.
이 소설이 그렇다고 순전히 숙명론적이거나 비관적이지만은 않다. 다섯 딸들이 불행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마지막으로 둘째 딸인 용빈이 막내 용혜를 데리고 사회주의적 낭만주의자이며 민족주의자인 청년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일제의 암흑기에서 모두가 일상적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 용빈은, 그 미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새로운 희망을 내다보며 설계하고 출발한다.
박경리의 소설은 항상 리얼리티가 강하다. <토지>나 <파시>에서도 그렇지만 <김약국>에서도 역시 인간들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들이 소용돌이친다. 따라서 관념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기독교는 이 소설에서 비교적 나약한 종교로 비쳐진다. 저자가 미래의 희망으로 설정한 용빈이 기독교인이지만 별로 종교적으로 심취해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그런 것에 있었다. 그녀와 결혼할 것으로 자타가 알고 있었던 홍섭도 역시 기독교인이었는데, 그는 용빈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브했는지, 아니면 사랑 보다는 현실적으로 유학의 기회가 보장된 여자를 택할 정도로 교활했는지 모르지만 어정쩡하게 용빈의 곁을 떠난다. 용빈의 애인이었던 이 남자의 태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저자는 기독교의 관념성이 인간 삶의 리얼리티를 결여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의 탁월성은 향토성에 있다. 통영(지금의 충무)의 언어, 정서, 주변 환경, 생활태도가 물씬 풍겨난다. 아마 박경리 여사가 직접 경험한 세계라서 더욱 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이 작품서 우리가 느낄 수 있듯이, 우리의 문학이 세계화되기 위해서는 더욱 한민족적이어야 한다. 굳이 통영 사투리로 작품을 썼다는 점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역시 한국적인 특성들이 여실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말이다. 박경리의 작품은 이런 점에서 성공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 소설이 민중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적, 세계사적 역사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동학혁명, 한일합방, 상해임시정부수립 등, 구체적 역사가 어떻게 민중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그런 와중에서 반짝이듯이 그 역사를 바르게 움직여 보려는 이들이 박경리의 머릿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9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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