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

교회(에클레시아)라는 단어는 복음서 가운데서 마태복음(16:18, 18:17) 외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교회를 조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제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조직하라고 말씀하시거나 암시하지도 않았음을 가리킨다 하겠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일컬어지는 교회의 기독론적 기초는 사도 바울에 의해 구성되었다. 이는 교회의 출현은 당위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가시적 현실 교회에 대해 언급할 때 그걸 설득할 수 있는 해석학적 근거를 제공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 경우 교회는 또 하나의 독단론에 빠지게 된다.
신약 성경 어디에도 표준으로서의 교회가 없을 뿐만 아니라 2천년 교회 역사 가운데서도 절대적인 교회 모델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확정된 모형으로서의 교회를 찾기 보다는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에 대해서 질문함으로써 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회의 과제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야말로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근거라는 말이다.
교회의 기능 내지 과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규정되고 있다. 첫째는 케리그마(복음선포), 둘째는 디아코니아(봉사), 셋째는 코이노니아(친교)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 디다케(교육)를 포함시키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디다케는 교회의 본질적 기능이라기보다는 그 외의 모든 부분을 원활케 하는 일종의 훈련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본질적 기능으로서의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가 상호적으로 연결될 때 교회는 건강성을 잃지 않게 된다.
우선적으로 케리그마는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능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의 진수를 전하는 행위로서의 케리그마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는 핵심적 기능이다. 케리그마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죄의 용서를 받으며 구원에 참여하라고 외치는 소리다. 실존적 깊이에서 경험하는 절망과 좌절을 딛고 구원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으라는 초청이다. 물질에 의지하거나 명예와 권력에 의지하는 인간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깨닫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생명의 세계를 희망하라는 호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시대를 초월해서 이런 복음을 간단 없이 외쳐야한다. 특히 오늘처럼 교회가 신앙을 문화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십자가와 부활의 구속적 능력과 은혜를 또렷하게 전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케리그마만을 독자적으로 선포함으로써 온전할 수 없다. 케리그마는 <디아코니아>와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복음 선포가 될 수 있다. 교회의 봉사적 기능으로서의 디아코니아는 주변부로서가 아니라 핵심으로서의 기능이라는 말이다. 디아코니아라고 할 때 일반적으로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여러 가지 봉사나 아니면 교회 밖에서 행해지는 구제활동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물론 이런 봉사도 역시 디아코니아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본질적 기능으로서의 디아코니아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를 본훼퍼의 말로 바꾸어 말하면 <타자를 위한 교회>라는 뜻이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즉 교회의 존재론은 디아코니아에 달려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의 모든 구조를 새롭게 갱신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교회 자체를 위한 프로그람으로 부터 벗어나 교회 밖을 향한 실천이 요청된다. 어떻게 타자를 위한 교회가 될 수 있는가? 타자를 위한 차원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기껏해야 매우 소극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구제활동만으로 -그건 많은 경우에 자신의 동정심이나 도덕심을 만족시키는 것에 불과한데- 디아코니아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디아코니아는 그런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차원을 뛰어넘는다. 정치, 경제적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도 역시 타자를 위한 교회가 맡아야 할 짐들이다. 민족을 위한 참된 봉사다. 예컨대 1979년 12월12일에 발생한 소위 ‘12.12’ 는 한국현대사를 굴절시킨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 교회가 어떤 봉사를 했는가? 그 뒤로 이어진 ‘광주민주화항쟁’ 사건도 만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유의 문제에 대해 침묵과 방관, 혹은 방조했다. 우리는 매우 무책임하게 행동하면서도, 이를 ‘오직 복음만을 전한다.’는 말로 변명했다. 결국 교회의 디아코니아가 철저하게 부정되거나 아니면 개인화 되어버린 셈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교회는 인간과 역사와 세계를 통전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하겠으며, 이런 차원에서 설교(케리그마)되어야 한다.
교회의 기능은 케리그마와 디아코니아의 상호관련 가운데서 진정한 <코이노니아>로 지향되어야 한다. 복음 선포와 봉사를 통해서 친교와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면서 근본적으로 친교와 일치를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더라도 받아들이거나 그대로 따르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대도시의 중산층 교회는 단단한 장벽을 치고 다른 집단이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같은 사회적 지위, 경제적 능력이나 교양을 가진 이들 끼리 신앙적 결사체를 이루어 간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열려있는 코이노니아의 교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 관계도 그렇다. 겉으로는 같은 성결교회 목회자라 하면서도 사실은 동지적 관계를 상실하고 있다. 당회장과 부교역자 사이가 그렇고, 경쟁적 관계에 있는 교회관계가 그렇다. 적당한 예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목회자 생활비만 해도 그렇다. 지나치게 많이 받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최저생활비도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는데도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거야 그 사람 능력에 달려있는 거 아닌가?’라고 추궁한다면 아무런 할 말이 없지만, 오늘의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코이노니아를 상실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이 세계도 역시 반(反)코이노니아적이다. 서로가 적대적이고 경쟁적이기만 한다. 특히 기득권을 가진 자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들은 철저하게 배타적으로 살아간다.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배타적이고, 백인은 흑인에게 배타적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점에서 코이노니아를 상실했다. 남한과 북한은 불일치 가운데서 50년 동안 지내왔다.
교회 기능으로서의 코이노니아는 또래집단 끼리의 친교에 머무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적 단절이 허물어지는 사건이다. 교회는 이 세계 가운데서 인간이 어떻게 코이노니아를 그 존재의 특성으로 삼을 수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막힌 담을 허무신 분이라는 기독론적 관점에서 본다 하더라도 교회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외쳐야 하는지 분명하다. 말로만의 코이노니아가 아니라 실천으로서의 코이노니아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위에서 열거한 교회의 세 가지 과제 중에서 한국교회는 거의 케리그마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순전히 개인적이며 실존적으로만 해석했기 때문이다. 온 세계가 어떻게 굴러가든지 그저 예수만 믿고 구원받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는 말이다. ‘일신상의 문제만 해도 골치가 아픈데 어떻게 다른 사람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며 일치를 이루며 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종의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전하면서도 사실은 이웃이나 세계와의 관계를 요청하는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에 대해서는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교회가 다시 균형 잡힌 교회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선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가 케리그마와의 상호관계 속에서 확장돼 나가야 한다. <디아코니와와 코이노니아>가 교회의 본질적 기능으로 작용하게 될 경우에만 교회는 이 세계구원을 선포할 자격을 부여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95.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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