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층(層)

우리 집 앞마당에는 몇 그루 꽃나무가 심겨 있고, 담장과 면해서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렇게 멋진 정원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약간의 정취를 맛볼 수 있어 다행이다. 작년 어느 때인가 현풍 장날 사다 심은 덩굴장미가 제값을 한다. 늦여름 감나무 에 달라붙어 울어대는 매미나, 깊은 가을 밤 현란한 현악기 독주처럼 계절의 맛을 농익게 만드는 여러 이름 모를 풀벌레가 이곳을 찾아온다. 자주 느끼는 바이지만 현풍 면사무소 앞마당에서 동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비슬산은 정말 아름답다. 1천 미터가 넘는 비슬산은 현풍을 병풍처럼 둘러쳐 있다. 모든 현풍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이 비슬산의 정기를 머금고 살아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산 아래로 현풍 지역 인구가 일 년 동안 먹고도 남을 만큼의 쌀을 생산해 낼 수 있는 현내벌이 멍석처럼 깔려 있다. 언젠가 새벽 비슬산 정상에서 바라본 현풍과 유가, 구지, 고령, 그리고 그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 줄기는 한 폭의 산수화였다.
이런 좋은 주변 환경 가운데서 산다는 건 아주 특별한 행운이다. 내 서재 안 까지 쏟아지는 달빛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거의 변함없이 계절에 따라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우리를 마주하고 있는 비슬산의 자태를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이런 것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게 바로 행복의 지름길인 것 같다.
우리가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다른 존재에 대해 눈을 뜰 수만 있다면 곳곳에서 이런 풍요한 세계를 찾을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이 무언가에 쫓긴다는 건 근본적으로 존재에 대한 관심을 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해서 이해한다는 것도 사실은 존재에 대한 이해와 같다. 어떻게 우리는 자신과 다른 이, 그리고 다른 생명체나 다른 사물들과 존재론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핵심이다. 우선 우리는 존재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부터 시작해서 존재양식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런 질문을 통해서 개체로서의 개인들이 갖는 존재 전체와의 상호관계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아직 까지 존재의 실체가 무언가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그저 어렴풋이 무언가 존재한다는 사실만 직관적으로 어림짐작 할 뿐이다. 아무리 첨단의 물리학이나 현대철학이 밝혀낸 진리라 하더라도 궁극적인 것, 절대 존재 앞에서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이렇듯 잠정적이고 유한한 인식능력에 불과하지만 끊임없이 주변 존재에 대한 관심을 통해 보다 근본적인 존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존재에 대한 이해, 이 존재에 터한 삶의 이해를 가져야만 우리는 우리 삶의 현상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모든 사물들은 나름대로의 존재자들이다. 가깝게는 감나무와 풀벌레들, 조금 멀게는 비슬산, 아주 멀게는 달과 태양과 그 빛이다. 어떤 것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어떤 것은 지구의 나이와 맞먹기도 한 존재자들이다. 미시적이거나 거시적이거나를 막론하고 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을 포함하여 그 주변의 모든 것들은 <존재>라는 근거에 터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오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을 이런 존재의 틀 가운데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인간만을 존재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우리 인간이 중심이 된 세계와 그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이런 사고방식 가운데서 바라보니까 다른 존재자들은 미개하거나 유치하고, 심지어는 무익하거나 유해한 것들로 치부된다. 때로는 인간들끼리도 이렇게 상대방의 존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니까 다른 종에 대해서야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모든 존재는 아름답고, 선하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그저 단순한 수사학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적인 진술이다. 예컨대 모기나, 귀뚜라미나, 거미 한 마리만 생각해 보도록 하자. 그것들이 미물이지만 그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건 놀라운 기적적 사건이다. 인간의 정보 능력 안에 들어와 있는 이 우주 공간 어느 구석을 아무리 뒤져봐도 모기라는 생명을 가진 존재를 발견할 수 없다. 모기의 존재성은 우주의 무게와도 같다. 온 우주가 그 한 마리의 모기를 위해 구성되었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말은 아니다. 지렁이도 그렇고, 무당벌레도 그렇고, 혹은 코스모스나 국화꽃도 그렇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 엄격하게 말해서 비존재만이 악하다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그런데 존재하는 것들은 그 양식에 있어서 약간씩 다른 길을 걸어왔고 앞으로도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존재는 여러 층(層)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나팔꽃의 존재양식과 개미의 존재양식, 혹은 돌고래의 존재양식은 분명히 구별된다. 특히 인간의 존재양식은, 우월하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과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이런 생물학적 차이만이 아니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보면 이런 존재의 층은 더욱 확실하게 구별된다. 평화와 사랑과 정의는 가장 심원한 존재의 층에 속한다. 이에 반해 미움과 증오와 불의는 천박한 존재양식이다.
존재 자체라는 점에서는 모든 존재자들이 같은 지평에 속하지만 존재양식이라는 점에서는 그 층을 달리한다. 즉 인간은 존재 자체라는 점에서 보면 송사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존재양식이란 점에서 보면 보다 깊은 층에 놓여있다. 거대한 생명의 세계를 움직여 나갈 책임이 인간에게 주어져있다고 하겠다. <95.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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