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 ‘외딴방’

서른두 살인 신경숙은 정읍 출신으로 소설집 겨울 우화, 풍금이 있던 자리, 깊은 슬픔, 그리고 산문집으로 아름다운 그늘을 펴냈고, 금년 말에 자전적 소설이라 할 ‘외딴 방’(문학동네 간)을 냈다.
외딴 방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신경숙은 자신이 10대 후반에 겪었던 삶의 경험들을 버텨내기 힘들었던 외로움으로 이해하고, 십여 년이 흐른 오늘의 시점에서 특별하지만, 또한 보편적이기도 한 그 경험들을 역망해 보고자 한다. 이 소설의 앞머리에 이런 글이 놓여 있다. “나의 큰오빠, 나의 외사촌, 지난 79년에서 81년 까지 영등포여고 산업체특별학급에 다녔던 그녀들, 최홍이 국어선생님, 그리고 나, 여기 머무는 동안, 내게 과거가 될 수 없는 희재 언니에게.”
이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는 신경숙의 과거역정은, 사실에 얼마나 가까운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이렇다. 그녀는 고향 정읍에서 부유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위로 두 오빠, 밑으로 남여 동생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 할 수 없는 형편이라서 1년 동안 놀았다. 그 사이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큰오빠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직업훈련원에서 세달 동안 기숙사생활을 하다가 열여섯의 나이로 구로공단의 동남전기공업주식회사에 취업하여, 낮에는 공순이로, 밤에는 산업체학교 학생으로 3년 동안 살았다. 대학에 가고 싶다는 열망을 눈치 챈 큰오빠의 도움으로 어찌어찌해서 서울예전 문예창작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소녀가 3년 동안 겪었던 삶의 상처와 그리움이 지금도 여전히 악몽처럼, 송곳처럼 주위에 멈춰 있었다. 이 소설은 대충 이런 이야기다.
외딴 방은 구체적으로 구로공단 부근의 3층 벽돌집인데, 부엌 하나씩 달린 방이 서른일곱 개나 있다. 화장실은 물론 공동이다. 매일 밤마다 골목 어귀의 가게에 가서 불 붙여 논 연탄을 한 장 사서 아궁이에 넣고 그 위에 새 탄 한 장 넣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가 끝나곤 했다. 그 작은 방에서 낮에는 동사무소에 나가고 밤에는 야간 대학에 나가던, 중간에 방위 근무를 하느라 새벽과 밤에 학원 강사를 하면서 동생을 돌봐주던 큰오빠, 시골에서 함께 올라와 회사와 산업체 고등학교에 함께 다니던 사촌언니, 그리고 어떤 때는 작은 오빠와 같이 세 명, 혹은 네 명이 살았다. 네 명이 누우면 더 이상 발 디딜 틈도 없던 작은 방인데, 소설이나 시를 쓰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을 가슴에 안고 있던 한 소녀가 그런 절망의 조건들 속에서 견뎌냈다는 건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다.
이 소설에는 몇 가지 상징적 언어들이 나온다. 물론 제목인 외딴 방이 우선적으로 두드러져 있으며, 열여섯, 혹은 열일곱이라는 그 당시의 나이, 그리고 고향집 앞마당에 있었던 우물이다. 열여섯으로 부터 열여덟에 이르는 나이는 아이와 어른의 중간 시기다. 모든 주변이 다르게 인식되는 환상의 시기다. 아침 안개 같은 꿈의 나이에 신경숙은 서른일곱 개의 방이 흡사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에서 단순히 생존마저도 불안했던 시절을 보냈다.
이 외딴방은 고향집 우물과도 같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쉬는 동안 그 절망을 견디지 못한 16살의 소녀는 쇠스랑으로 자기 발을 찍었다. 발에 박힌 쇠스랑을 빼지도 않고 한 켠에 누워있던 그녀를 밭일 갔다 돌아온 어머니가 보시고 깜짝 놀라 붙잡아 일으켜 치료해 준다. 그 일이 있은 다음 다시 자기 발을 찍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녀는 쇠스랑을 우물 속에 던져버렸다. 그 비밀을 가족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고 살아왔다. 자기학대를 뜻하는 쇠스랑이 숨어있는 우물은 외딴방처럼 잊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일종의 굴레로서 이 소설에 계속 등장한다.
이 소설은 어떤 면에서 신경숙이 저주와 한으로 생각하고 있는 희재 언니에 대한 고백성사와도 같다. 희재 언니는 2층에 있는 외땅방에서 한층 더 올라간 3층에 살았다. 신경숙과 마찬가지로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고 있다가, 그 현실을 견디지 못해 학교는 그만두고 밤에 의상실에 나간다. 의상실에서 사귀게 된 남자와 동거하다가 임신 까지 하게 된다. 아이 출산 문제로 다투다가 남자와 헤어진다. 어느 날 아침에 희재 언니는 신경숙과 함께 집을 나서면서 시골에 다녀온다면서 방문을 잠그지 않았으니까 저녁 때 대신 잠가달라고 열쇄를 맡긴다. 그날 저녁 아무 생각 없이 3층의 희재 언니 방문을 열쇄로 잠궈 놓았는데, 며칠 지난 다음 희재 언니의 남자가 찾아와 방문을 부수고 들어가 보니 희재 언니의 몸에는 벌써 구더기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 후로 신경숙은 외딴방을 뛰쳐나와 더 이상 가지 않았다. 희재 언니의 방문 열쇄를 채우면서 방안을 한번만이라고 살펴보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자책감이 그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한편으로 이 소설에는 십대 후반의 소녀가 겪게 되는 사회적 문제들이 뜨문뜨문 나오고 있다. 구로공단에서 공원들이 당하는 인권침해, 노사갈등, 사랑, 그리고 5.18 광주사건과 삼청교육문제 등이 그렇다.
외딴방은 신경숙에게만이 아니라 1960, 70년대 이 땅에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아주 많은 사람에게 해당된다. 스스로 어쩌지 못하는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이다. 외땅방은 ‘출구없는 방’일 수도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런 해결 기미가 없는 그런 조건들이다. 그런데 신경숙에게는 그 외딴방의 상처들이 오히려 생명의 양식이 됐다. 그녀는 공장 조립대 앞에 앉았을 때나, 야간 학교 책상 앞에서나, 외딴방에서 시간 나는 대로 국어 선생님이 건네 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모조리 대학노트에 베꼈다. 그런 꿈을 갖고 사는 사람은 언젠가 외딴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95.12.17.>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