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순자 김형덕의 이야기

매스컴의 보도에 의하면 스물 두 살 된 김형덕 군은 1994년 9월 중국을 거쳐 남한에 귀순했는데, 그동안 남한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17개월만인 지난 2월3일 또 다른 곳을 찾아 밀항을 기도하다가 발각됐다고 한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사로청 청년돌격대 지도국 산하 평남 돌격대 군인이었다고 하는데, 특별한 기술도 없고 해서 북한에서도 평균 이하의 생활을 했다고 한다. 남한에 귀순한 후 정부로 부터 정착금 1천4백만 원을 받아 7백만 원으로 방을 하나 얻고 나머지로 생활 도구를 준비했다. 부푼 꿈을 안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신문배달, 건설현장 막노동, 골프장 공줍기, 주유소 직원 등의 일을 했지만, 탈북자가 겪게 되는 소외감과 자괴심 내지는 무력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결국 남한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최근 여타 탈북 망명보도를 접하면서 “왜 와, 그냥 살지...”라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했다고 가장 가까운 친구인 또 다른 귀순자가 전했다(조선일보,2월9일).
김형덕 군의 <남조선 드림>이 산산 조각나게 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주체사상으로 교육받은 북한의 젊은이가 남한 땅을 찾아 망명할 때는 그만한 마음가짐을 가졌을 텐데, 이곳에서 여러 직업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결국 남한을 다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건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될만한 일이 아니다. 우선 우리는 김형덕 군 개인문제로 접근해 볼 수 있다. 김 군의 정신력이 남달리 약해서 다른 귀순자들이 다 감내하는 어려움을 견뎌내지 못했는지 모른다. 사실 우리 남한에서는 노동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먹구 살아가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지금 노동력이 부족한 형편이기 때문에 그런대로 구직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고, 더구나 웬만한 공장에는 미혼자를 위한 기숙사도 구비돼 있어서 먹고 지낼 만하다. 김형덕 군은 북한에서 아주 어렵게 지냈기 때문에 아무리 남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게 힘들었다 해도 그걸 견뎌내지 못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먹구 살기 힘들어서거나, 혹은 김 군 개인의 정신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데서 해답을 모색해 보는 게 옳을 것 같다.
정확한 햇수를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20 여 년 전 쯤으로 생각되는데, 한창 박정희 독재정권이 끝발을 올리고 있을 때 김형덕 군과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소위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이다. 북한의 명망가였던 이수근 씨가 남한으로 망명한 후, 정부에서는 대대적으로 환영대회를 열거나 매스컴에 등장시켜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게 했다. 그는 남한에서 재혼도 하고 여러 면에서 자리 잡힌 생활을 하게 됐다. 그러던 중 갑자기 그가 간첩이었다는 말과 함께 월북을 위해 동남아를 여행 중 체포당했다는 소식이 남한 사회를 강타했다. 그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당했다. 우리 같은 일반 시민이야 그 속사정을 자세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얼마 전에 그 사건을 재조명한 TV 프로그람을 보면 이수근 씨가 남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실체를 제법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 일인 숭배체제를 참아낼 수 없어 자유민주 사회인 남한을 찾아 왔지만 결국 남한 사회도 폐쇄적이긴 북한과 별 다른 게 없어서 남한도 북한도 아닌 제 삼의 세계에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우리 사회라는 게 경직될 대로 경직되었고, 저임금과 각종 악법으로 인해 자유인으로서는 숨쉬기조차 힘들었기 때문에 이수근 씨에게 견딜 수 없는 갈등이 있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이해할만 하다.
김형덕 군은 이수근 씨처럼 지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이념이나 관념의 갈등을 겪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북한의 절대가난을 도피해서 찾아온 남한 사회에서도 역시 인간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좌절을 만났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비슷한 경험이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특히 아직 젊은 김 군이 북한 사회와는 철저하게 달랐던 남한사회에서 겪었던 두려움은 그를 막다른 선택의 길로 몰아갔을 것이다.
어떤 집단에 이질적 개체가 들어와서 견뎌내야 하는 정신적 충격은 엄청나다. 고향에 있는 땅과 집을 다 팔아 서울에 있는 자식들에게 올라간 노인들이 비록 문화생활이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별로 행복스럽게 살지 못하고 대개는 시골로 다시 내려가거나 그도 저도 안될 경우 심하게는 자살하게 되는 것과 같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미국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그들은 여러 이유에서 한국 탈출을 시도했지만 미국에서 살면서 이민을 후회할 정도로 정신적 갈등을 겪게 된다. 아무리 좋은 집에서 살거나 세련된 문화생활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피부, 다른 정서, 다른 가치관, 다른 역사적 경험, 거기다가 외국인을 향한 저들의 선입관 때문에 항상 긴장하며 살아가게 된다.
우리 정부나 시민단체는 김형덕 군을 비롯한 귀순자들에 대한 배려에 너무나 소홀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순전히 그들을 이용하려고만 하거나, 아니면 그저 방 한 칸 마련하고 세간 마련할 돈 몇 푼 던져 주면 자기가 알아서 열심히 살아갈 수 있으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김형덕 군은 우리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란 게 아니었다. 그는 개인의 능력과 경쟁력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우리 사회 질서에 적응할 수 있을 만큼 채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김형덕 군의 이야기는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통일의 시대에 드러나게 될 민족 차원의 문제다. 가난하고 경쟁력을 갖지 못한 북한 주민들이 우리를 무서운 형님으로 생각해서 다시 떠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건 통일비용에 앞서 그들이 잘났던 못났던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형제애의 회복이다. <96.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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