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존재

나의 대학 시절인 1970년대 중반에 가장 많이 읽힌 책 중의 하나가 에릭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였다. 프롬은 인간 삶의 형태를 소유지향적인 것과, 존재지향적인 것 두 가지로 구분하면서 사회심리학자로서의 예리한 통찰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여전히 책읽기에 초보자에 불과했던 나를 한눈팔지 않고 단번에 독파하게 할 정도로 명쾌하게 쓰인 책이었다. 그 당시 열심히 읽기는 했지만 <소유와 존재>가 담고 있는 개념에 쉽게 도달할 수는 없었다. <소유 지향적>이란 말은 대충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존재 지향적>이란 말은 여전히 강 건너에 있을 뿐이었다. 80년에 포천 일동의 모 사단에 군목으로 입대한 후, 우리 사단에 소위로 임관한 초임장교들에 대한 정신교육 시간을 맡았을 때 이 책을 들어가며 오늘의 시대정신 가운데서 지성인으로 살아가는 게 무언가를 역설하기도 했다. 강의가 끝나자 육사를 갓 졸업한 어떤 장교가 <존재>가 무언지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 고 했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고 얼버무린 것 같다. 그 후 나이가 들고 생각이 좀더 깊어져서야 그 개념분별이 명확하게 다가오게 되었는데, 프롬의 이 책은 지금 까지 내 사상과 삶에 한 모퉁이를 받쳐주고 있다. <존재론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학문적 이해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적 삶의 운명을 결정하는 준거이기도 했다.
인간이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하다. 그런 삶에의 의지와 정열은 인간 역사를 가능케 하는 에로스로 작용한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 행복인가, 무엇이 생명에의 참여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그런 조건들만을 소유하려 든다는 데 있다. 특히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양식은 바벨탑을 쌓아가던 창세기의 고대인들처럼 경쟁적으로 자신의 소유물을 쌓아가는 것으로 삶을 확인하려고 한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언가를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이다. 행복한 삶의 절대조건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집, 자동차, 컴퓨터, 에어컨 등은 우리 주변에 잠시 머물 뿐이지 영원히 남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사유물에 집착함으로써 정작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리고 사는 게 오늘 현대인들이다.
위에서 소유가 진정한 소유일 수 없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 지향적>이란 개념을 설명해야 한다.
존재 지향적이란 말은 모든 사물에 대한 생각을 그 존재 자체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꽃은 꽃으로서 존재하며, 물고기는 물고기로서 존재하고, 나무는 나무로서 존재한다. 꽃을 꽃으로 알고, 물고기를 물고기로 알며, 나무를 나무로 아는 게 존재지향적인 생각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땅이나 나무나 물을 그것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이용할 대상으로 여길 때 우리는 반(反)존재 지향적이다. 몇 년 전 죽은 성철 승려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법어는 이런 존재 지향적 사고에 근거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정언들을 그저 교양적 차원에서만 받아들이지 삶의 내용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교양을 쌓아도 삶 자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존재 지향적이란 말은 사물의 존재근거에 초점을 두는 삶의 양실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심층적 존재의 차원으로 돌입해 들어가는 걸 말한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현풍에서 대구로 나갈 때 여러 교통편이 있다. 어떤 이는 시외버스를 타고, 어떤 이는 승합차를 타고, 또 어떤 이는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는 이를 부러워하고,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현풍에서 대구 까지 간다는 사실 자체다. 무얼 타고 가는가 하는 문제는 부차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덜 중요한 문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고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대구로 나가는 버스 안에 앉아 있으면서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모두 놓쳐버리고 어떻게 빨리 돈을 벌어 좋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가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이에 반해 존재 지향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얼 타고 가던지 대구에 나간다는 사실 자체에 삶의 무게를 올려놓고 그 과정에서 다가오는 모든 주변의 일들, 사람들, 사물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존재 지향적 삶의 양식을 갖게 되면 보다 근원적인 존재에 의존하게 된다. 프롬의 말을 빌리면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의존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생각 보다 쉽고, 생각 보다 중요하며, 실제적이다. 우리가 만약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 있기만 하다면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궁극적인 존재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 이외의 소유물들이 아주 작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늦겨울에 내리비추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적은 월급을 받는다 해도 그걸 별로 서럽지 않게 느낀다. 아무리 큰돈을 갖고 있다 해도 이런 햇살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돈은 되지 못하니까 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는 자기의 내적 세계가 매우 풍요로워졌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는 풍요로움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인간은 엄청난 갑부들이다. 하늘과 땅과 나무와 꽃이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색깔과 소리를 느낄 줄 안다는 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가? 우리나라의 거대 십대 재벌이 아무리 용을 써도 얼어붙은 땅을 녹여내는 한 조각의 햇살도 만들어낼 수 없다. 우리가 소유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참여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고, 자유롭고, 즐겁게 이 세상을 살다가 떠날 수 있을 것이다.
(96.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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