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절을 노래하자!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교회력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는 성탄절과 부활절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약간 다른 차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절기는 교회력이 시작되는 대강절(大降節)이다. 성탄절에 앞선 네 주간이 바로 대강절이며, 교회력으로만 말하자면 대강절 첫 주간이 한 해의 시작이다.
이 절기는 예수님의 초림을 기억하고 재림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대강절이 가리키고 있는 <기억>과 <기다림>이 바로 기독교적 특성을 가장 실감 있게 보여주는 언어다. 말하자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기억과 기다림 이라는 양 축을 오가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뜻인데, 이 말의 신학적 내용과 오늘의 삶에 해당되는 해석이 무엇인지 잠시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에 있다. 그분이 삼년 공생애 중에 하신 말씀, 행위, 십자가의 죽음, 부활, 승천을 기억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이 시작된다. 종교일반이야 어떤 철학적 깊이나 열광주의적 초월경험을 말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그런 종교적 경험보다는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격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한다. 예수는 심오한 철학을 말하지도, 높은 도덕률을 말하지도,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다. 물론 그런 요소들이 예수의 생애에 분명히 나타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거나, 아니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즉 그분은 전문적인 철학자나 종교가, 혹은 윤리적 스승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분명히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종교적 능력이 아니라 그분 자체를 기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가 이런 기독교적 본질에 확고하게 서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에 집중해야만 한다.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교회당을 꾸미는 일이나 예배행위를 경건하게 하는 일, 혹은 세계선교의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일 보다는 예수의 삶 자체에 신앙의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곧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관심이다. 그 이외의 것들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도구들에 불과하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본다고 해도 오늘 우리가 어떤 일에 마음을 쏟고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준다. 초기 교회 공동체는 종교적으로 세련되고 잘 발달된 유대교적 전통을 따르지 않고 아주 단순하게 예수를 기억했을 뿐이다. 유대인들이나 로마정부로 부터 불경건하거나 무신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들은 순전히 초림의 예수를 기억함으로써 그것을 신앙의 기초로 삼았다. 이런 점에서 대강절은 결국 초림의 예수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 기억하는 절기다.
예수를 믿고 사는 우리는 이제 궁극적으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린다. 성서에 약속되어 있는 그 날은 온 세계에 심판이 임하는 날이며, 동시에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설계와 행위를 멈추고 그 분의 말씀에 근거해서 판단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지금은 우리가 여전히 이 세상의 정치와 경제 질서 안에서 힘들어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불의한 질서에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의 재림 때는 그 모든 것으로 부터 해방 받게 된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경쟁력이 떨어지는 자, 지체장애자들이 생명의 능력을 충만하게 받게 된다. 이때를 기다리며 희망하는 이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며, 대강절은 바로 이런 신앙을 새롭게 확인하는 절기다.
위에서 말한 예수의 초림이나 재림 모두 한 가지 초점을 지향하고 있는데, 그게 바로 구원이다. 초림은 예수의 말씀과 행위에서 구원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말하며, 재림은 마지막 때에 구원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기본적으로 이런 구원론에 기초해 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이 시작되었으며 완성된다는 믿음이다.
우리가 다른 관점으로 한 가지 더 새겨야 할 것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의 삶이 초림과 재림의 중간기, 구원의 약속과 구원의 완성 사이에 놓인 중간기, 따라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약속에 근거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실존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또렷한 믿음 가운데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 이 불안은 초림과 재림 사이를 나그네처럼 살아가는 모든 기독교인들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짐이다. 그러나 이 짐을 진 기독교인들의 얼굴은 그저 고통과 절망에 얼룩지지 않고 희망으로 장식되어 있다. 비록 힘들지만 희망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여느 때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시련기이다. 사업가나 노동자, 관료나 장사꾼 모두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한숨을 내쉬고 있다. 이런 상태가 얼마간 계속되면 완전히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경제적 불안감만이 아니라 정치적 허무주의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며칠 안으로 다가왔는데도 별로 신명이 나지 않는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별로 달라질 게 없지 않는냐 하는 게 우리 일반백성들의 정서다.
이렇게 모두가 절망하고 있을 때 교회는 대강절의 소식을 소리 높혀 외쳐야 한다. 이 세상에 구원이 완성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임박하고 있다는 놀라운 복음을 전해야 한다. 어떤 점에서 교회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자신의 불충과 무감각을 깨우칠 수 있었던 닭울음소리와 같다. 예수의 초림을 생생하게 기억할 줄 알고,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아가는 자들은 세상의 불안을 짊어졌지만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소리 높여 외치는 시대의 예언자여야 한다. <1997.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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