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

발등에 떨어진 불이 다급했던 탓인지, 좋게 보아서 차분하게 진행된, 솔직하게 말해서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한 대통령 선거가 드디어 끝났다. 김대중 씨가 총 유효투표 중에서 40.3%인 1천32만6천2백75표를 획득해서 이회창씨를 1.6% 포인트 많은 39만5백57표 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혹은 지방자치 단체장이나 의원들을 뽑을 때 마다 느끼는 바이지만 왜들 그렇게 어려운 길을 자진해서 가려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선거에서 이긴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기는 하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우쭐할 만도 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 같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그 많은 책임을 생각하면 골치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런대도 그런 일을 떠맡겠다고 하니, 더 나아가 자기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하니, 그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중에는 자신들이 토해낸 말처럼 국민과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진다는 심정으로 나선 이들이 없진 않겠지만, 만약 참으로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낙선했다고 해서 억울해 하거나 서운해 할 게 하나도 없다. 당선되면 무언가 봉사할 기회가 생긴 거고 떨어지면 어려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편해서 좋다. 그런데 이번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자기만이 이 토탄의 백성을 구원할 수 있다고 외쳤다. 다른 사람이 당선되면 나라를 망치게 된다고 부르짖었다. 굳이 나라의 모든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겠다는 그 주장, 더구나 자기만이 그 일을 해야겠다는 그 확신은 어딘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어쨌든지 이 나라를 앞으로 5년간 이끌어갈 새 대통령 김대중 씨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그러나 그가 당장 이 나라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꿈을 갖지도 않는다. 민족의 긴 역사에서 그가 감당해야 할 역할은 사실 미미할 뿐이다. 그가 최소한 언행일치, 수미일관의 사람이기를 지켜볼 뿐이며, 기껏 바라는 게 있다면, 그가 어떤 자세로 대통령직을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그 태도에 대해서만 한 마디 지적해 두고자 한다.
우선 대통령은 너무 의욕을 앞세우지 말아야겠다. 혼자서 모든 문제를 몽땅 해결해서 역사적으로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망상을 버려야 한다. 도대체가 위대한 대통령, 위대한 왕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세계사에 기록된 많은 황제, 장군, 대통령, 수상들이 있지만 그들의 능력이 모두 겉으로 보듯이 대단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 주변에 있던 수많은 참모들, 물불 가리지 않고 맹종하던 신하들, 왕을 아버지로 알아 충성했던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언가를 이룰 수 있었을 뿐이다. 또한 그들의 위대해 보이는 일들이 항상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파괴적인 요소가 훨씬 많기도 했다. 물론 우리가 존경하는 지도자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존경받는 지도자는 스스로 원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되고 싶다는 욕심을 버렸을 때 자연스럽게 되는 법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마하트마 간디가 스스로 명성을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건 아니다. 테레사 수녀가 노벨 평화상을 얻으려고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다. 그 사람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설정한 높은 가치관대로, 혹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살다 보니 민족과 종파를 초월해서 존경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프랑스의 미테랑이나 독일의 슈미트, 브란트 같은 이들도 역시 정략적으로, 인기에 영합해서 산 게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대로 굳은 의지를 갖고 정치를 하다 보니 그 부분에서 존경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좀더 우리가 엄격하게 말한다면 어떤 위인도, 어떤 카리스마적 인물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건 아니기 때문에 겸손해야만 한다.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다 보면 무리수를 두게 되고 결국 모든 걸 잃고 만다.
김영삼 대통령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 임기 초반 90% 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이 10% 대 밑으로 떨어진 가운데서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곤두박질하게 된 이유는 우리 국민들의 감정적 태도에도 어느 정도 연유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김 대통령 스스로의 책임에 있다. 자신의 정치철학에 따라 소신을 갖고 정치를 해서 그것이 통하면 좋은 거고, 통하지 않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을 해야지, 그저 국민들의 지지만 생각하다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임기를 마치게 되었다. 개혁을 추진하려면 다른 소리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했을 텐데, 이것으로 손해 받은 집단들의 조직적 반발 때문에, 그리고 소위 가신들의 부도덕성 때문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역사에 남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도가 너무 강했던 탓에 오히려 결과적으로 무능력한 대통령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과하면 모자람 보다 못하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병리현상은 업적주의다. 군사정권 하에서 우리가 너무 군사문화에 길들여진 탓인지 겉으로 드러나는 업적에 사로잡혀서 살아왔다. 수출 몇 억 달러, 경제개발 몇 주년 계획, 지엔피 일만 달러! 우리는 이런 수치놀음에 인이 박혀서 자신의 존재성을 자신의 업적에서만 찾았다. 이제 새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 수행기간 안에 무언가를 이루어놓으려는 강한 의도를 접어두고 백성들의 심부름꾼이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일하다가 임기가 끝나면 미련 없이 그 일을 그만 두면 된다. 21세기를 이끌어갈 대통령이라고 관심들이 많은 것 같은데, 21세기라고 해서 사람 사는 게 별 다르지는 않다. 여전히 밥 먹고 똥 누고 아기 낳고 숨 쉬고 산다. 이런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대통령의 가장 큰 책무다. <1997.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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