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ding never land


지난 주간에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한편은 19일 저녁에 ‘인문학적 성서읽기’ 모임과 함께 본

“신과 함께 가라”였으며,

다른 한편은 24일 저녁에 샘터교회 교우들과 함께 본

“finding never land”(이하 ‘네버랜드’)였다.

위의 것은 찬양의 영성을 추구하는 수도사들이

이 세상과의 만남에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이며,

아래의 것은 ‘피터팬’ 작가가 그 이야기를 쓰게 된

일종의 후일담이다.

‘네랜드’는 ‘유토피아’다.

그런 곳은 없다.

없는 바로 그곳이야말로 생명의 원천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없음’이 어떻게 ‘있음’의 근원이 될 수 있는가?

사람들은 늘 무엇인가 ‘있다’는 사실에만 마음을 쏟고 있기 때문에

그것 너머의 현실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모르겠다.

‘네버랜드’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동화의 상상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될 수 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그를 구출하는 정의의 기사도 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 가능한 이런 동화의 상상력이

어른들에게 가능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그만큼 지성적이기 때문일까?

우리가 그만큼 이 세계를 더 잘 알기 때문일까?

이것만큼 큰 착각도 없다.

어른들이 세상을 알다니...

거짓말이다.

착각이다.

전혀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고 살아갈 뿐이다.

이에 반해 아이들은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동화의 상상력이 가능하다.

물론 어른들에게도 꿈이 있다.

그들은 세계 일류가 되겠다는 꿈을 꾼다.

자신의 업적을 인정받겠다는 야무진 꿈을 꾼다.

하룻밤에도 집을 여러 채 짓는 동화를 쓴다.

아이들의 동화와 어른의 동화는 어떻게 다른가?

아이들의 동화는 그것 자체의 힘이 살아나지만

어른들의 동화는 사람에 의해서 의도될 뿐이다.

아이들의 동화는 아이들을 정신적으로 살려내지만

어른들의 동화는 어른들을 탐욕의 주체로 만들어버린다.

아이들의 동화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지만

어른들의 동화는 이미 정해진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동화는 그 결과가 어떠하든지 아무 상관없지만, 즉 자유롭지만

어른들의 동화는 그 결과가 그 사람을 철저하게 지배한다. 즉 의존적이다.


우리가 어떻게 아이들의 동화를 쓸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내버랜드로 여행할 수 있을까?

‘네버랜드’에서 작가는 어머니를 잃은 피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가 옆에 있다고 상상해라.

imagination!

모든 문학, 예술, 건축, 철학은 이 상상에서 출발한다.

현실적으로 옆에 있는 게 아니지만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실체로 나타나는 그것이 상상이다.

이런 상상력으로 이 세계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이들의 동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런 상상력의 세계 안에는 ‘요정’이 등장한다.

요정은 존재하나?

‘네버랜드’에 의하면 이런 질문은 무의미하다.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존재하고,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게 요정이다.

사랑의 요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사랑의 열정에 빠질 것이다.

지나치게 실증적인 사고방식에 치우친 사람들에게는

이런 요정 따위의 이야기가 시시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조금만 이 세상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그걸 인정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담소하는 중에도

옆방에 누워 자던 아이의 울음소리를

그 아이의 엄마는 듣는다.

무엇이 이 엄마의 청각을 이렇게 예민하게 만들었을까?

혹시 요정은 아닌가?

아스팔트 틈새를 뚫고 돋아난 민들레꽃을 보신 적이 있는지?

그 일을 누가 했을까?

요정이 그런 건 아닐까?

눈이 내린다.

하늘의 구름이 눈으로 바뀐 건

요정의 아름다운 지팡이가 한 바퀴 돌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대목에서 “그런 생각은 기독교적인 게 아닌 것 같다.”하고

시비를 걸지 마시기를.

그런 모든 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지

요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큰 소리 치지 마시기를.

그런 요정 이야기는 우상숭배, 이단사상이라고

윽박지르지 마시기를.

요정을 천사로 생각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걸 믿는 사람에게는 요정과 천사가 보일 것이고,

그걸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요정과 천사를 보고 살고 싶으신지,

아니면 그런 힘들을 경험하지 않고 싶으신지.

나는 예수를 낳은 마리아처럼,

또는 그의 남편이었던 요셉처럼

천사의 언어를 들으면서 살고 싶다.

아니, 이미 그런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그들의 행복한 춤이 내 눈에 보인다.

이 세상에 요정과 천사가 가득하다.

그게 안 보인다니, 이런 안타까운 일이.


당신은 요술과 주술을 믿는가, 하고 질문할 분들이 있을 것 같다.

요술, 주술, 신앙, 영성, 신비 ....

이런 것들을 딱 부러지게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무당의 영성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시는지?

물론 그런 사람을 죽이라는 구약성서 말씀에 따른다면

이미 대답은 주어졌다.

그러나 구약성서가 왜 그런 행위를 척결하려고 했는지가 중요하다.

이들은 생명의 신비를 여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폐쇄하는 쪽으로 활동했다는 게 핵심이다.

사람들의 운명을 일종의 숙명주의에 묶어놓는 행위였다.

성서는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의 창조행위로 보았다.

이 말은 곧 인간이 그 어떤 방식으로도

그것을 완전히 해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무당들은 자신들이 그걸 결정지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생명의 창조성을 무시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무당들이 어떤 영적 경험을 하는지

완전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뭐라 단정적으로 말할 입장이 아니다.

오해는 마시라.

목사가 무당까지 용납하는가, 하고 말이다.

이 세상의 일들을 지나치게 선과 악의 대립으로만 보지 않는 게 좋다는 뜻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공산당은 무조건 나쁘다거나,

동성애는 반기독교적이라거나,

타종교는 우상숭배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오늘 내 글이 왜 여기까지 흘러나오게 됐는지 모르겠다.

나는 기본적으로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한다.

다른 데서도 언급했다고 보는데,

아리아와 창을 섞어서 노래를 부르는 건

별로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 세상의 신비를 열어두고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내 계산으로 처리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대한 해명은 신학자들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자, 철학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그들의 해명에 근거해서

그것이 왜 하나님의 창조행위인가를 변증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자들의 세상해명에 대해서 우리는 불안하게 생각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해명에 의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행위라는 게 부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 학문이 이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부정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기본적으로 불신앙이다.

비록 일시적으로, 부분적으로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그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즉 하나님의 창조사건이 근본적으로 부정될 수 있다면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염려는 붙들어 놓아도 좋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런 갈등이 우리 앞에서 벌어지기는 한다.

쉬운 예로,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 같은 것 말이다.

여기서 이런 논쟁 자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이런 갈등이 벌어지는 이유는

독단적인 과학자들과 독단적인 신학자들이 대결한다는 데에 있다.

자신들의 행위가 얼마나 부분적인 것인지를 모르는

독단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부풀려지는 소모적 논쟁이다.


이만 줄여야겠다.

하나님의 나라는 일종의 ‘네버랜드’다.

그 나라는 “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없음”이다.

그 없음이 오히려 있음의 근원이다.

‘네버랜드’와 ‘에버랜드’(ever land)의 신비로운 관계를

조금씩 알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의 근원 안으로

첫발을 내딛는 것이리라.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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