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평생의 화두는 종교와 과학의 관계입니다. 


하는 일이 '근거에 기반을 둔 의학'이기 때문에, 과학적 사고에 익숙해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사고 또한 낯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개를 조화시키는 것은 사실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괴롭습니다. 


종교와 과학은 충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이 선지자는 신으로부터 받은 지식을 사람들에게 전파합니다. 선지자는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그의 말은 맹목적으로 추종되어야 합니다.  근거가 아예 없지는 않으나 결국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반면, 과학은 '우리는 모른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합니다. 과거의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몰랐고,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과학에서 선지자가 없는 것은 아니나, 종교에서처럼 존중받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한 주장의 옳은 것은 받아들이지만, 잘못된 주장은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라도 거부됩니다. 


문제는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라는 점입니다. 신학적 깊이가 아무리 깊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의 과학적 사고를 전혀 촉진시키지 못합니다. 바울은 예배시간에 여자들은 머리를 가리라고 했습니다. 여러가지 해석이 있으나 창세기 6장 2절에 나오는 하늘의 천사들이 사람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유혹되게 하지 말라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이처럼 바울과 같은 고대인은 하늘에 하나님과 천사들이 거하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한 듯 합니다. 


마르틴 루터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듣고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저런 어리석은 자가 있다니! 성서에 보면 여호수아가 해를 보고 멈추라고 했지, 지구를 보고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더 어리석은 말을 했는지 이제는 압니다. 


갈릴레이는 지동설 때문에 당시 교회에서 재판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종교에 의한 과학의 탄압은 이오니아의 과학자들의 주장이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거부된 것부터 시작되어 그 역사가 매우 깁니다. 르네상스 이후에야 과학이 종교를 압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학혁명이후 인류는 수천년의 절대 빈곤에서 벗어났습니다. 인류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되었으나, 놀랍게도 수천년동안 1인당 소득은 크게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는 식량생산이 늘어난만큼 인구가 지속적으로 증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과학혁명이전에는 태어나는 모든 인구가 식량생산에 뛰어든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혁명이후 인구의 증가속도보다 식량생산의 속도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도 절대빈곤에서 벗어납니다. 


과학과 종교의 대결에서 과학이 드디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신학도 거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다윈이 진화론을 처음 주장하였을 때 신학자들이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이제는 근본주의 신학자이외에는 그런 신학자들은 없다고 봅니다. 반대로 신학이 과학에 영향을 준 사건이 있을까요. 글쎄요. 르메르트의 '빅뱅'이론이 다소 그런 면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과학적인 증거가 있기 때문에 인정받을 뿐입니다. 


혹자는 과학과 종교는 영역이 다르다고 주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그런 영역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과학이 다루지못하는 영역이 있을까요? 주관적인 영역은 객관적인 과학이 다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융의 심리학에 그렇게 심취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신학이나 종교는 이러한 영역으로 점점 내몰리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정용섭 목사님께서는 세상의 낙엽이나 들풀을 보고도 생명의 신비를 느끼는 것이 진정 영생의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까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만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제 친구 예술가가 저를 보고 한번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자네같은 과학자들은 무지개나 꽃을 보더라도 아름다움을 보기보다 그것을 분석할 뿐이지 않아? 나는 그것이 안타깝네. 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과학자들도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압니다. 그리고 그것의 이면을 봅니다. 꽃이 왜 아름다울까? 결국 꽃이라는 것은 곤충으로 하여금 수정을 하게하는 도구인데, 그렇다면 곤충도 미적 감각이 있는 것인가? 그러면 그들의 미적감각과 우리의 미적감각은 무엇이 다른가? 이런 주제들은 매우 흥미롭습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들이 똑같은 것을 보고 일반인들과 다른 것을 느끼는 것처럼 과학자들도 그들이 보지 못하는 신비한 세계를 봅니다. 


자연과학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물적 욕심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우리가 저녁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정육점 주인, 양조업자, 제빵업자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근대에 들어 개인의 욕망이 긍정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상위 10%의 사람이 부의 50%이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의롭지 않다는 주장은 어떻습니까? 자연을 봅시다. 위계가 완벽히 잡혀 있는 유인원 사회의 경우, 가장 높은 계급의 원숭이는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많은 배우자와 성행위를 즐길 수 있으며, 좋은 곳에서 사는 반면, 하위계급의 원숭이는 날마다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배우자를 구하기도 힘들고 불편한 잠자리를 가집니다. 단체행동을 하지 않는 바닷가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닷가재도 저마다의 영역을 가지며 자기 영역을 침범한 바닷가재와 싸워 이길 경우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신경계에 분비되어 이긴 바닷가재는 더욱 자신만만하여 다음 싸움에서도 이길 확률이 높아지고, 진 바닷가재는 의기소침해지면서 다음 싸움에서도 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결과적으로 소수의 바닷가재가 먹이를 구하기 쉽고 천적을 피하기 쉬운 영역을 차지하게 되고 여럿의 배우자를 가질 기회도 늘어나게 되고, 진 가재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이 더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는 것이 자연의 섭리입니다. 이것도 불의한 것인가요? 물론 자연의 섭리가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경제환경이 그것과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반론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시장을 통제하지 않는다면 소수의 사람에게 부가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이것이 과연 인류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 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시장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 지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부의 불평등의 정도를 x축 사회의 발전가능성을 y축으로 둔다면 그래프는 아마도 종모양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가 너무 균등해서도 너무 불평등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어쩌면 백년 뒤 또는 이백년 뒤에 우리의 후손들은 우리가 지금 갈릴레이의 재판을 비웃듯이 우리의 설익은 경제학적 정의감을 비웃을지 모릅니다


제주도의 예멘 난민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멘 난민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에 비춰보자면 당연히 우리는 그들은 받아들여야합니다. '우리도 나그네 였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위정자들이 성경을 근거로 예멘 난민을 받아들이자고 한다면 저는 반대할 것입니다.  그들이 들어와서 생기는 사회적 이득과 손실은 과학적으로 평가되어야하고 그들이 들어오면서 우리사회가 더 불행하게 바뀐다면 그들을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글이 길어집니다. 저는 과학자이면서 종교인이기에 겪는 개인적인 분열의 고통에 대해 토로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과학이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무의식,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종교가 답이 된다고 잠정적으로 생각은 합니다만, 이것이 하나의 자위행위가 아닌가하는 의문이 맘속에 남아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과학은 결국 세상의 초등학문일 것입니다. 허나, 우리도 이 세상의 물질로 이루어진 존재들이기에 이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것이외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도움을 간구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여러 고견이나 충고 부탁드립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