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 전통, 그리고 문자주의

1.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
독일의 나치스는 정권 장악에 성공하자 ‘인종 차별법’을 만들어 유대인에 대한 모든 차별을 합법화합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가혹한 ‘심판’이 시작된 것입니다. 유대인은 공원 벤치같은 공공장소에도 출입할 수 없게 되었고 곳곳에는 ‘유대인 출입 금지’ 팻말이 붙었습니다. 유대인이 소유하고 있는 기업과 상점은 모두 몰수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판의 전주곡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나치스는 소련 침공 계획을 수립하면서 유대인을 제거하는 임무를 전담할 살인특수부대를 창설합니다. 그리고 곳곳에 세워진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합니다. 그들은 눈앞에 보이는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증오하고 짐승처럼 취급하면서 일대일 방식으로 살해했습니다.1) 임신한 여성과 저항 능력이 없는 노인, 그리고 어린이들이 손을 비비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이렇게 강제 수용소에서 죽어나간 유대인은 300만 명이 넘었습니다.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는 이 끔찍한 사건의 배후에는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 퍼져있는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전통적으로 ‘예수를 죽인 살인자들’, ‘자기들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민족’, 그리고 ‘돈만 밝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러한 반감은 유럽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 발전합니다. 최호근은 《제노사이드》에서 “반감 차원의 정서가 독일에서 상업과 산업 자본주의가 성장하게 되면서부터는 하나의 부정적 이데올로기로 변해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가혹하게 생각한 사람은 거의 유대인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것입니다.

 

2. 폭력의 정당화

이데올로기로 인한 폭력의 가장 무서운 점은 사회 구성원들이 그것을 정당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동자삼 이야기>
늙으신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온갖 약을 드려도 차도가 없었다. 하루는 노인이 오더니 아버지의 병을 고치려면 제일 친근한 사람을 끓여드리라고 했다. 아들은 세 살 된 자기 자식밖에는 없다고 여겨 이 일을 아내와 의논하니, 아내는 아버지는 한번 돌아가시면 그만이지만 아들은 또 낳으면 된다며 찬성했다. 감동한 남편이 밖에서 놀다 들어오는 아이를 솥에다 넣고 끓였다. 그런데 얼마 후 아이가 엄마를 부르며 뛰어 들어오는 것이었다. 의아하고 놀란 부부가 솥을 열어보니 동자삼이 들어 있었다. 부부는 하늘이 정성에 감동하여 동자삼을 보내주었다고 생각했다. 이를 아버지께 드리니 병이 나았다. 나라에서 이 일을 알고 상을 주었다.2)


이 이야기에서 아들은 ‘효’를 위해 살해당합니다. 그런데 부부가 아들을 죽였는데도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늘은 감동하고 나라에서는 상을 줍니다. 살아 돌아온 아들도 자신을 살해하려한 부모를 원망하기는커녕 엄마를 부르며 반갑게 뛰어 들어옵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효가 법으로 작용하며 ‘효’라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법정에서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나치스가 위풍당당하게 수많은 유대인들을 죽일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이 고통당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공감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반유대주의는 오래된 진실이며 자명한 진리와 같았습니다. 동성애자와 진화론자에 대한 차별과 배타적 태도 역시 그것이 성경적으로 정당하다는 인식이 깊게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의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 Status Anxiety》에서 이데올로기가 편파성과 부당함을 교묘하게 감춘다고 고발합니다.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편파적인, 어쩌면 비논리적이고 부당할 수도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 접근한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자신은 그저 오래된 진실을 이야기할 뿐이며, 오직 바보나 미치광이만이 여기에 반대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3. 전통에 의지하는 것은 정당한가?
이데올로기가 늘 존재해왔고 또 늘 존재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그것이 대개 전통에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은 이데올로기의 가장 훌륭한 보호막입니다. 성경축자무오설을 바탕으로 하는 문자주의 역시 전통의 보호를 받으면서 예수의 그리스도 됨 같은 자명한 기독교적 진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들을 모두 누려 왔습니다. 성경축자무오설의 수호자들은 그것이 <훌륭한> 기독교적 전통에 의한 것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그러나 성경축자무오설의 오류와 부당함에 대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전통이 과연 옳은가를 감히 질문했을 때 그것이 대개 혼란과 오류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샹포르는 대개 편견과 비논리로 가득한 전통을 다음과 같이 조롱합니다. “어디에서나 가장 터무니없는 관습과 가장 어처구니없는 의식들이 ‘하지만 그것이 전통이야’라는 말로 용인되고 있다. 유럽인이 남아프리카 호텐토트 사람들에게 왜 메뚜기를 먹고 몸에 붙은 이를 삼키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도 바로 그런 말을 했다. ‘그것이 전통이오.’”


4. 예수의 경우
우리는 성경에서도 부당한 전통에 맞선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그것을 지키는 행위에만 집착하던 바리새파 사람들의 전통에 철퇴를 가합니다.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았으며,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 … 그래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이 전하여 준 전통을 따르지 않고,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사야가 너희같은 위선자들을 두고 적절히 예언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해도,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훈계를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마가복음7:3~8)


5. 부당한 전통의 운명
오늘날의 사람들이 당시의 반유대주의를 반성하는 것처럼, 부당한 이데올로기 전통들은 서서히 사라져 왔습니다. “처음부터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도록 정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바꿀 권리도 능력도 없는 영원한 신의 뜻이다.”라는 퍼시 백작의 말처럼 19세기 서양인들에게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 질서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버나드 쇼는 《지적인 여자를 위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안내》에서 남존여비 이데올로기의 쇠퇴와 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9년을 보내고 노년 연금이나 과부연금을 받고, 여자가 투표를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들이 의회에 가 있는 것이 자연 질서의 일부이며 전에도 늘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증조모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을 악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예수를 따르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훌륭한 전통과 이데올로기라도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마땅히 철폐되어야 하고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하나님의 뜻은 전통의 보호 아래 성경축자무오설로 인한 문자주의 해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만 전달되어 왔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한 가지 질문이 반드시 던져져야 합니다.

<정작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문자주의 전통으로 인해 투명하게 전달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독일의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기독교가 믿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교회도 전통도 아닌 오직 순전한 하나님의 뜻과 진리뿐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심각한 의심과 진리에 대한 실망 속에는 여전히 진리에 대한 열정이 작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대한 당신의 불안을 너무 빨리 해소하려는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 유혹이 당신의 교회이든, 당신이 속한 당파이든 아니면 당신의 부모 때부터의 전통이든 간에 정말 당신 자신의 진리가 아니면 거기에 유혹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이 예수와 함께 갈 수 없다면 모든 심각함으로 진지한 회의주의자인 빌라도와 함께 가십시오.  폴 틸리히,《새로운 존재》中



1) 최호근 《제노사이드》책세상, 157쪽
2) <동자삼 이야기>, 《대계》

<하랑> http://blog.naver.com/jaharang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