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 <열린 토론실>입니다. 다비안들의 부담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랑채>와는 달리, 보다 진지하고 깊이있는 이야기나 주제를 나누고 싶은 분들을 위한 게시판입니다. 가급적 예의를 갖추시고 열린 마음으로 대화에 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울러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토론과 대화는 다비안을 비롯한 여러 네티즌들의 온라인 상에서의 자유로운 것이기에 그 방향과 정체성이 반드시 다비아와 일치하지는 않음을 밝혀둡니다.
글 수 253
제가 다니는 (장로교) 교회에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지 행위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배웠고 저역시 여기에 동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장로님께서 "믿음 +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네요. 그 분께서는 십자가를 비유로 믿음 (세로) + 행위 (가로) 가 있어야 한다면서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시네요.
또한 어떤 분은 바울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안된다고 했다면서 반드시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행위"는 믿는 사람은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인가요?
성령은 열매로써 확인되는데 그 열매는 반드시 행위로써 확인 된다고 하는 데 정말 그런가요?
저는 행위도 인간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은혜에 의해서 된다고 보았는데 제가 틀린것이었나요?
그런데 제가 아는 장로님께서 "믿음 +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네요. 그 분께서는 십자가를 비유로 믿음 (세로) + 행위 (가로) 가 있어야 한다면서 행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하시네요.
또한 어떤 분은 바울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안된다고 했다면서 반드시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하시는데 "행위"는 믿는 사람은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인가요?
성령은 열매로써 확인되는데 그 열매는 반드시 행위로써 확인 된다고 하는 데 정말 그런가요?
저는 행위도 인간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은혜에 의해서 된다고 보았는데 제가 틀린것이었나요?
2008.01.09 14:46:26
예) 서해안 기름유출 사고로 말미암아 각 교회에서 기도를 많이 합니다.
서해안의 복구를 위해서 기도만 하면 복구가 되지 않습니다.
직접가서 모래한줌이라도 닦아야 회복이 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길 나는 못가니 다른 사람이 많이 내려가서 복구되게 하소서라고 하면 그게 믿음일까요?
서해안의 복구를 위해서 기도만 하면 복구가 되지 않습니다.
직접가서 모래한줌이라도 닦아야 회복이 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하길 나는 못가니 다른 사람이 많이 내려가서 복구되게 하소서라고 하면 그게 믿음일까요?
2008.01.09 15:55:17
목수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가 안가는 부분은 그럼 믿음이 많은 사람 일 수록 행위도 많나요? 행위가 적으면 믿음이 적은 건가요?
또한 진정 주님을 주로 섦기면 다른 것은 다 가치없는 것이므로 버려야 하나요? 예를 들어서 전 재산을 헌납하는 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건가요?
아직 이해가 잘 안되네요. 좀 더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진정 주님을 주로 섦기면 다른 것은 다 가치없는 것이므로 버려야 하나요? 예를 들어서 전 재산을 헌납하는 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건가요?
아직 이해가 잘 안되네요. 좀 더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8.01.10 00:03:39
paul님의 글에 대한 제 생각을 올립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때 이는 행로에 곤하셔서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목말라하시는 주님께 물을 드리는 행위와 같다.
마 25:31-46에는 이웃사랑의 삶이 없는 자에 대한 성경의 엄중한 경고가 나온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우리 모두는 저마다 정립한 자신의 신앙원리를 올바른 것으로 여기며 각자 주님께 속하여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에 인용한 주님 경고의 말씀처럼 어쩌면 마지막에는 오른편의 양과 왼편의 염소로 나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구절을 통한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의 미래를 두 갈래 길로 갈라놓는다고 주님은 경고하시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행위를 동반한 참 믿음과 행위없는 믿음의 차이다. 이로부터 왼편의 염소에 속한 무리는 영벌에 처해지게 된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주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 가운데 그분을 잘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믿음과 섬김이 참이 아니라는 판결을 주께로부터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과 섬김이 참이 아니고 위장된 것이었음을 주님은 무엇으로 판단하고 계신가? 그것은 바로 그들의 행위 곧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지 않았다>> 라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가 아무리 주님을 잘 믿고 사랑한다고 외쳐도 그의 사랑은 거짓이라는 말씀과 같다. 다시 말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그런 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비단 이곳 뿐이 아니다. 성경 전체가 바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치며 이를 어길 때 그의 미래가 어떠할지를 엄중히 경고하신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거나 혹은 이를 지키려는 마음을 느슨하게 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생각이라는 점이다. 누구든지 위 본문을 무시하지 않고 정말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려 한다면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때 이는 행로에 곤하셔서 야곱의 우물가에 앉아 목말라하시는 주님께 물을 드리는 행위와 같다.
마 25:31-46에는 이웃사랑의 삶이 없는 자에 대한 성경의 엄중한 경고가 나온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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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저마다 정립한 자신의 신앙원리를 올바른 것으로 여기며 각자 주님께 속하여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에 인용한 주님 경고의 말씀처럼 어쩌면 마지막에는 오른편의 양과 왼편의 염소로 나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저 구절을 통한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의 미래를 두 갈래 길로 갈라놓는다고 주님은 경고하시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행위를 동반한 참 믿음과 행위없는 믿음의 차이다. 이로부터 왼편의 염소에 속한 무리는 영벌에 처해지게 된다.
물론 그들 스스로는 주님에 대한 진실한 믿음 가운데 그분을 잘 섬기면서 신앙생활을 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믿음과 섬김이 참이 아니라는 판결을 주께로부터 받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과 섬김이 참이 아니고 위장된 것이었음을 주님은 무엇으로 판단하고 계신가? 그것은 바로 그들의 행위 곧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지 않았다>> 라는 것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가 아무리 주님을 잘 믿고 사랑한다고 외쳐도 그의 사랑은 거짓이라는 말씀과 같다. 다시 말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그런 자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비단 이곳 뿐이 아니다. 성경 전체가 바로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치며 이를 어길 때 그의 미래가 어떠할지를 엄중히 경고하신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거나 혹은 이를 지키려는 마음을 느슨하게 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생각이라는 점이다. 누구든지 위 본문을 무시하지 않고 정말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대하려 한다면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008.01.10 00:04:09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가에 앉아 계실 때,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는 장면이 있다. 예수께서 그녀를 보시고 물을 좀 달라고 청하셨다. 물을 달라시는 것은 아직도 주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에게 하시는 요구, 특히 단순한 선 가운데 있으나 참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시는 요구이다.
나아가 주님의 목마르심은 참진리가 없어 죽어가는 자신의 백성을 구하시려는 주님의 열렬한 바램이다. 인류구원을 위한 그분의 바램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실 때 “목마르다”하신 말씀의 선포로도 표현되고 있다. 이 바램은 그분께 마실 것을 드리도록 피조물에게 원하시는 영원한 호소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그분께 마실 것을 드릴 수 있을까? 그것은 참진리가 우리의 각박한 마음 곳곳을 적져주어 마침내 거기 서로에게 선과 진리를 나누는 이웃사랑의 삶이 나타날 때 우리는 목마르신 주님께 마시는 물을 드리는 것이 된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려는 것은 그분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시게 해드리기 위함이다. 그래서 주님께 우리의 가장 좋은 생각과 애정, 감사함과 찬양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이 거룩한 성별의 실제적 나타남은 대부분 이웃사랑의 삶을 통해서다. 즉 우리의 가장 참된 예배는 생활 속의 예배들,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신 것같이 타인을 섬기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주는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 드리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분 스스로 이렇게 확증하셨다. “내가 배고팠을 때에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이에 대해 의인이 말한다. “주여, 언제 우리가 당신에게 배고프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당신께서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주님의 대답이시다. “너희가 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어떻게 해서 타인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될까? 선과 진리에 목말라 그것들로 갈증이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래는 마음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주님은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기심에 의해 서로 등돌리고 저마다 홀로 사는 경우 선과 진리를 갈구하는 열망이 죽어가고 그 결과 주님은 우리들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으시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배고파하시고 목말라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참회하는 겸허한 마음가운데 있으면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바라는 영혼을 만족시키려 노력할 때 그분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드릴 수 있다.
결국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일 만큼이나 절대 중요한 관건임을 성경은 증거한다. “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무시하면 자칫 왼편의 염소에 해당되어 영원한 불에 처하게 된다는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잊지 말자.
나아가 주님의 목마르심은 참진리가 없어 죽어가는 자신의 백성을 구하시려는 주님의 열렬한 바램이다. 인류구원을 위한 그분의 바램은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실 때 “목마르다”하신 말씀의 선포로도 표현되고 있다. 이 바램은 그분께 마실 것을 드리도록 피조물에게 원하시는 영원한 호소이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그분께 마실 것을 드릴 수 있을까? 그것은 참진리가 우리의 각박한 마음 곳곳을 적져주어 마침내 거기 서로에게 선과 진리를 나누는 이웃사랑의 삶이 나타날 때 우리는 목마르신 주님께 마시는 물을 드리는 것이 된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려는 것은 그분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우시게 해드리기 위함이다. 그래서 주님께 우리의 가장 좋은 생각과 애정, 감사함과 찬양의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속에 있는 이 거룩한 성별의 실제적 나타남은 대부분 이웃사랑의 삶을 통해서다. 즉 우리의 가장 참된 예배는 생활 속의 예배들, 주님께서 우리를 섬기신 것같이 타인을 섬기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주는 가운데 우리는 주님께 드리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분 스스로 이렇게 확증하셨다. “내가 배고팠을 때에 너희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나에게 마실 것을 주었다.” 이에 대해 의인이 말한다. “주여, 언제 우리가 당신에게 배고프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당신께서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주님의 대답이시다. “너희가 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어떻게 해서 타인을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될까? 선과 진리에 목말라 그것들로 갈증이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래는 마음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주님은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기심에 의해 서로 등돌리고 저마다 홀로 사는 경우 선과 진리를 갈구하는 열망이 죽어가고 그 결과 주님은 우리들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으시다. 그러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배고파하시고 목말라 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참회하는 겸허한 마음가운데 있으면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바라는 영혼을 만족시키려 노력할 때 그분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드릴 수 있다.
결국 이웃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하나님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일 만큼이나 절대 중요한 관건임을 성경은 증거한다. “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무시하면 자칫 왼편의 염소에 해당되어 영원한 불에 처하게 된다는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잊지 말자.
2008.01.10 02:04:41
폴님에 글에 대한 짧은 답변입니다.
1. 믿음이 많은 사람 일 수록 행위도 많나요? 행위가 적으면 믿음이 적은 건가요?
- 많은 곳에 감당할 수 있는 행위를 하면 좋으련만
- 오늘의 우리네 삶이 감당하기엔 어렵습니다.
- 작은 행위라도 좋은 뜻이 담긴 향기는 움직이지 않아도 바람이 불면 주변으로 퍼져나가 전달됩니다.
- 나 혼자 모든 걸 내어 놓는것 보다 더 큰 결과물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2. 또한 진정 주님을 주로 섦기면 다른 것은 다 가치없는 것이므로 버려야 하나요? 예를 들어서 전 재산을 헌납하는 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건가요?
-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면 가치 없는 일이 거의 없을 겁니다.
- 전 재산을 예로 들어 주셨는데. 주님은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 믿음은 이겨낼 수 있는 상식범위 내에서 행위를 요구합니다.
- 하느님은 우리가 세상에서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것 또한 영광으로 받아 들입니다.
- 삽비라와 같은 맘이 있다면 아나하시는게 더 은혜인듯 합니다.
- 전 재산이라는 것은 이미 내것이 아니요, 가족 공동의 것이기도 합니다.
-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보단 스스로 할 수 있는 작은 참여가 소중하다고 사료됩니다.
주님의 평강이 늘 가득하시길 목수 두손 모읍니다.
1. 믿음이 많은 사람 일 수록 행위도 많나요? 행위가 적으면 믿음이 적은 건가요?
- 많은 곳에 감당할 수 있는 행위를 하면 좋으련만
- 오늘의 우리네 삶이 감당하기엔 어렵습니다.
- 작은 행위라도 좋은 뜻이 담긴 향기는 움직이지 않아도 바람이 불면 주변으로 퍼져나가 전달됩니다.
- 나 혼자 모든 걸 내어 놓는것 보다 더 큰 결과물을 가지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
2. 또한 진정 주님을 주로 섦기면 다른 것은 다 가치없는 것이므로 버려야 하나요? 예를 들어서 전 재산을 헌납하는 것이 가장 믿음이 좋은 건가요?
- 진정으로 주님을 섬기면 가치 없는 일이 거의 없을 겁니다.
- 전 재산을 예로 들어 주셨는데. 주님은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겁니다.
- 믿음은 이겨낼 수 있는 상식범위 내에서 행위를 요구합니다.
- 하느님은 우리가 세상에서의 삶을 즐겁게 살아가는 것 또한 영광으로 받아 들입니다.
- 삽비라와 같은 맘이 있다면 아나하시는게 더 은혜인듯 합니다.
- 전 재산이라는 것은 이미 내것이 아니요, 가족 공동의 것이기도 합니다.
- 모 아니면 도라는 생각보단 스스로 할 수 있는 작은 참여가 소중하다고 사료됩니다.
주님의 평강이 늘 가득하시길 목수 두손 모읍니다.
2008.01.10 11:27:01
엄기욱님과 목수님의 정말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목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문제는 얼마전에 제가 물어 보았던 죄 문제와 비슷한 것 같네요. 암만 주님께 기도해도 이쁜 연예인 보면 눈이 돌아가는(?) 문제에 대해서 바우르님께서 대답해 주신 것과 비슷한것 같네요. 바로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니깐 뿅하고 엄청 착해진다기 보다는 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야한다는 말씀인것 같네요.
목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이 문제는 얼마전에 제가 물어 보았던 죄 문제와 비슷한 것 같네요. 암만 주님께 기도해도 이쁜 연예인 보면 눈이 돌아가는(?) 문제에 대해서 바우르님께서 대답해 주신 것과 비슷한것 같네요. 바로 주님의 은혜를 받았으니깐 뿅하고 엄청 착해진다기 보다는 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야한다는 말씀인것 같네요.
2008.04.09 17:32:38
폴님 행위는 믿음의 필요 충분조건이라 보셔도 된다고 생각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저자들의 생각입니다..
목수님 말씀에 몇마디 달자면
1.믿음이 많은 사람은 행위가 많은가 하시는 질문인데..
물론 믿음을 정량하 할수는 없겠지만 이 질문은 바뀌어 져야 합니다.
즉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말이지요 ^^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 보면 당연히 믿음의 열매가 삶에서 결실 될 것 입니다.
2.진정 주님을 주로 섬기면 다른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버려야 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저는 목수님의 답변은 자꾸 근본 진리를 벗어나려는 듯이 보입니다.
핵심을 말씀 드리지요 "당연히 가치없는 것으로 버려가야 합니다"
주님이 그러했고 사도들이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햐였습니다..
"배설물" 즉 똥으로 여굤던 것입니다...
전 재산을 헌납하는 것이 가장 좋으냐 물으셨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전 재산을 헌납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제물"과 "세상"에 소망을 두느냐 두지 않느냐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상식내에서의 헌신을 요구하신다 하셨느네^^
목수님 성경 다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구약교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상식선의 믿을을 요구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신약 성경 다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상식선의
믿음을 요구 하셨나요^^
우리 자꾸 우리 신앙의 수준을 우리묙심의 기준으로 낮추지 맙시다..
그리고 목사님들도 제발 그런 수준 낮은 신아도 믿음이라고 교인들의 신앙에
회칠 하여서는 안된다 생각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저자들의 생각입니다..
목수님 말씀에 몇마디 달자면
1.믿음이 많은 사람은 행위가 많은가 하시는 질문인데..
물론 믿음을 정량하 할수는 없겠지만 이 질문은 바뀌어 져야 합니다.
즉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의 열매를 많이 맺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말이지요 ^^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 보면 당연히 믿음의 열매가 삶에서 결실 될 것 입니다.
2.진정 주님을 주로 섬기면 다른 것은 가치 없는 것으로 버려야 하는가 하는 것 입니다.
저는 목수님의 답변은 자꾸 근본 진리를 벗어나려는 듯이 보입니다.
핵심을 말씀 드리지요 "당연히 가치없는 것으로 버려가야 합니다"
주님이 그러했고 사도들이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햐였습니다..
"배설물" 즉 똥으로 여굤던 것입니다...
전 재산을 헌납하는 것이 가장 좋으냐 물으셨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전 재산을 헌납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제물"과 "세상"에 소망을 두느냐 두지 않느냐 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상식내에서의 헌신을 요구하신다 하셨느네^^
목수님 성경 다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구약교회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상식선의 믿을을 요구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신약 성경 다시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상식선의
믿음을 요구 하셨나요^^
우리 자꾸 우리 신앙의 수준을 우리묙심의 기준으로 낮추지 맙시다..
그리고 목사님들도 제발 그런 수준 낮은 신아도 믿음이라고 교인들의 신앙에
회칠 하여서는 안된다 생각 합니다
식사를 할 때 밥만 했다고 배가 부르진 않습니다. 수저로 밥을 먹는 행위가 있어야 식사완료가 되는것이죠.
행위가 없는 사람이 어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
하느님께 기도해야 하는 걸 아는 사람은 두손모아 기도행위를 하지요.
기도행위를 했다면 그 기도에 맞게 살아가게 되어있는거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