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글을 쓴다는 것이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다고 생각되어 글을 쓸까말까 쓸까말까 망설이다가, 서로 개념의 뜻을 명확히 해두는것이 여러모로 좋겠다는 생각에 망설이며 글을 씁니다.

아 저는 어머니와 서울예배때 늘 앞에서 목사님 말씀을 듣는 학생입니다. 

우선 어떤분이 질문하시면서 기독교 변증과 변증법에 대해서 동일시 하시며 기독교 성경의 논리가 서구 철학과 동일한 변증법 아니냐 질문하셨는데 

실은 변증이라는 한글어가 동일해서 그렇지 뜻은 다른 동음이의(homonym)어입니다.

변증(apologetics)는 기독교를 사상적으로 변호해서 옹호하는 작업을 가리키고

변증법(dialectic)은 철학의 방법론중 하나입니다.

변증(apologetics)을 흔히 그래서 기독교 변증이라고 자주 부르죠,

기독교 변증가들은 따라서 초기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과 파스칼, 키에르케고르 와 같이 기독교Christianity에 대해 지적으로 변호하는 사람들 입니다. 어거스틴의 저서 자유의지론, 파스칼의 팡세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술들  같은 것들이 바로 기독교 변증서들입니다. 

이에 반해 변증법(Dialectic)은 철학의 방법론중 하나입니다.

변증법을 어원적으로 살펴본다면 변증법은 우리가 알듯이 그렇게 복잡하고 거창하지 않습니다.

dia 두사람이-  lektikē 대화한다. 즉 두사람의 대화라는 희랍어 dialektikē디알렉티케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간단한 변증법의 정의는 우리가 알고있는 거창하고 추상적인 변증법에 관한 도식보다 명료한 뜻을 알려줍니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두사람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근데 대화는 항상 무엇에 관한것 입니다. 일상적 대화, 농담 뭐 기타 잡스러운 것들이 있겠죠.
 
그중 진리에 관한 대화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은 모든 대화를 다루지 않습니다. 철학에서 다루는 대화는 진리에 관한 대화입니다.

철학이 다루는 진리에 대한 대화가 바로 소크라테스 플라톤적 기원의 변증법입니다.

일반적으로 대화는 항상 두항(사람)을 전제로 합니다.  

두사람이 진리에 관해서 말할땐 처음에는 서로의 소박한 견해의 모순점을 짚어내며 비판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순을 계속 발견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둘이 동의하는 합의점을 찾을 것입니다. 물론 그 합의점이 진리라는 보장은 없겠지만 모순 투성이 였던 초견보다는 좀더 진리에 가까워졌겠죠.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추상적인 변증법 도식 정-반-합의 원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변증법은 정반합의 도식으로 딱 떨어지지 않습니다. 변증법은 기계적인 논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식인 정반합의 도식에 맞춰본다면 이 대화는 정반합의 도식과 상당히 일치합니다.  정과 반은 항상 두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두사람이 진리에 관해 대화하면서 서로 모순되었던 주장을 극복하고 새로운 합의점에 도달한다면 그것이 합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진리를 향한 대화를 통해 모순점을 발견하고 극복해나가는 논리가 다름아닌 변증법이고, 

 이것이 다름아닌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적 산파술입니다. 플라톤이 대화편에서 기술하고 있는것이 다름아닌 이러한 변증법적 논리 입니다.

플라톤은 Eidos 즉 형상 혹은 이데아 Idea를 바로 이러한 진리에 관한 대화 즉 변증법을 통해 알수 있다고 주장했지요.

그래서 플라톤에게서 변증법은 '진리의논리학'(the Logic of Truth)이 됩니다. 

그후 변증법은 여러 철학사적 변천과정을 겪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의해 혹평을 받은후 변증법은 그 의미가 격하되게 됩니다.(보통 우리말로 변증론, 변증술로 옮겨진 것은 변증법을 진리의 논리학으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철학자들을 번역할때 그렇게 합니다. 원어는 dialectic으로 변증법과 같습니다.)

이 변증법이 독일 관념론철학에 들어오면서 다시 진리의 논리학으로 부활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 주동자가 바로 헤겔입니다.
(대표적이란 말은 한사람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러한 행간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에 의해 격하된 변증법을 진리의 논리학으로 부활시킵니다.

헤겔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더이상 대화의 논리일 뿐만아니라 존재의 논리가 됩니다.

존재하는 것들이 변증법적 구조를 갖는다는 겁니다.

모든 존재자들은 존재하며 동시에 자기자신을 부정하고 새로운 단계로 올라가면서 존재합니다.

이것이 바로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의 핵심인 지양(Aufhebung)입니다.

Aufhebung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폐기하고 보존하고 고양된다는 세가지 모순된 뜻이 있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이 세가지 뜻을 전부 차용합니다. 모든 존재자들은 스스로를 지양합니다. 다시말해 스스로를 폐기하면서 보존하고 동시에 고양됩니다.

이렇게 설명하니까 어렵게 들립니다. 이러한 존재방식을 갖는 존재자가 있습니다. 다름아닌 생물체,즉 유기체입니다. 모든 유기체들은 성장과정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부정하는 가운데 자기동일성을 가지며 보존하면서 고양됩니다.

소년노무현이 어른노무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부정하고 동시에 자기 동일성을 보존하면서 고양되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헤겔의 변증법은 철저하게 유기체적 논리이며, 그런점에서 정용섭 목사님께서 즉문즉답시간에 헤겔의 변증법이 정반합의 도식을 바탕으로한 기계적인 인과성의 논리이다고 말씀하신건 헤겔에 대한 완전히 잘못된(compeletely wrongheaded) 해석입니다. 하지만 이게 보통우리가 가지고 있는 변증법에 관한 잘못된 편견이죠.

사실 헤겔 변증법이 정반합이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헤겔의 삼대주저 정신현상학이나 논리의학(Wissenschaft der Logik), 법철학을 아무리 뒤져봐도 헤겔의 변증법적 운동을 정반합이라는 기계적인 삼박자에 맞출 수 없습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유기체적인 사태의 존재방식 그 자체에 집중하며 존재 그자체의 논리를 뽑아내기 떄문입니다.

하르트만이 독일관념론철학에서 논리의 학에서 발견되는 변증법의 형식만 무려49가지라고 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기모순을 통해 지양Aufheben되는 존재의 변증법적 논리는 '대립된 것들의 통일' 이란 말로 더욱 명료하게 설명됩니다. 이 말에 아직도 우리가 처음에 파악한 디알렉티케의 어원적 의미가 아직도 보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반합의 기계적 도식이 얼마나 추상적인지 확인 했습니다.

한가지 더 정목사님의 말씀 즉 헤겔이 기계론적인 인과론이라는 주장에 답하겠습니다. 헤겔의 논리가 기계론적 인과론이 아닌것은 그 논리가 유기체론적이라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유기체들은 마치 어떤 목적이라도 있는듯이 생장합니다. 지나가는 개가 상처를 입으면 그 유기적 조직은 마치 자기보존의 목적이 있는듯이 상처를 치유합니다. 새싹은 꽃을 피려는 목적이 있는듯이 생장해 나갑니다. 이렇게 유기체들의 생장은 목적론적입니다. 특히 자기보존의 목적성이 뚜렷이 발견될 수 있지요.

헤겔의 논리가 유기체론적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의 논리의 유기체적 역동성이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특히 이점은 그의 역사철학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는 존재와 인류역사의 이런 변증법적 활동이 절대정신의 실현, 자유의식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목적론은 기계론적 인과성과는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aitia)설에서 4가지 원인이 제시되는데 형상인 목적인 질료인 작용인이 그것입니다.

근대철학의 도래와 함께 데카르트-갈릴레이 근대역학은 작용인을 제외한 모든 원인을 세계설명에 있어 제거해 버립니다.

따라서 모든 원인은 기계론적인 작용인과로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헤겔은 이와 정반대로 갑니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설명방식을 변증법적인 논리를 통해서 복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재에는 변증법적 생성이 향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절대정신으로의 복귀 입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설이 유기체에 기반을 둔 원인설이었다는 점에서 헤겔과의 유사성을 또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목사님이 헤겔 법칙이 기계적이라고 한 데에서 저는 숨은 행간을 읽을랍니다.

그 뜻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헤겔의 이러한 논리가 특히 이러한 논리로서 설정된 역사발전의 목적론은 논리에 필연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교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헤겔에게 있어 절대정신은 이세계에 내재해 있습니다. 나도 이글을 보시는 다비안 분들도 절대정신의 일부분입니다.(헤겔의 절대정신은 범신론적입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영향인데 자세한건 생략하겠습니다.) 절대정신은 자신의 부분들을 추동하여 자신을 세계에 실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변증법적으로, 다시 말해 대립된 것들을 통일 시킴으로서 역사를 운영합니다. 이 과정은 필연적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헤겔의 논리가 유신론을 가장한 무신론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여기서는 인류역사에 대한 어떠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개입도 허용치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또한 헤겔의 절대정신은 어떤 인격적 신도 허용치 않습니다. 헤겔의 신은 개념적인 존재이고 이론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따라서 나와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이 불가능해 집니다.

헤겔에게서 키에르케고르는 그리스도교의 붕괴를 목격하고서 그에 대해 강하게 비판합니다.

헤겔이 20세기 신학에 끼친 영향은 이런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적 문제의식을 단초로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인류역사를 절대정신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닌 필연적 법칙을 통해서 이 세상에 실현되기 위한 발전적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과도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게 정목사님의 숨은 행간이 아니었나 추측합니다.

 변증(apologetics)와 변증법(dialectic), 그리고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기를 위해 최대한 쉽게 서술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단순하게 처리해 버린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면 서 이만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