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사목(목회)을 하지 않는 대신, 평신도로서
여러 신부님과 목사님들의 설교를 폭넓게 들으려 애쓰는 가운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본래 그리스도교 예배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며,
교회가 간직하고 전승해 온 그리스도에 대한 회상과 가르침을 말씀의 전례에서 선포하고,
그 이후에 그 주인공이신 그리스도의 육화(성육신)과 십자가, 부활을 기억하며,
그 주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성찬의 전례를 가진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말씀의 전례)에 있어,
그 중심은, 독서대(강단)에서 봉독되는 성서 말씀 그 자체이지,
성서 말씀의 해설인 설교가 말씀의 전례 내지 예배의 가장 중요한 중심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대단히 부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스도교 예배, 즉 전례의 정신은,
(개신교 신학에서는 '전례'를 예배의 형식, 규범 정도로 생각합니다만,
협소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라고 봅니다)
과월절 어린양 그리스도의 잔치(성찬의 양식과, 이를 조명하는 말씀의 양식)라는 축제성,
하느님의 선포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하느님 백성의 응답,
하느님의 임재와 선포 앞에서의 겸허한 침묵의 영성,
하느님과 백성, 집전자와 회중, 회중과 회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교회공동체적 통공(교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전례 전통에 비추어서 작금의 개신교, 특히 한국의 다수 개신교회들의 예배의 상황을 말하자면 끝이 없겠습니다만,
적어도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말씀'을 놓고 본다면,
목사의 설교가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인식은,
하느님의 자리와 그 선포를 밀쳐내고 인간의 말로 대체해 버리는,
하느님을 높인다면서 실상은 하느님의 자리를 찬탈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오류 아닐까요.
그리스도교 예배의 전통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데 말이지요.

구약성서의 핵심 메시지인 '쉐마'(이스라엘아 들으라)를 백날 강조하면 뭘합니까?

물론, 설교를 현재적 선포로서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바르트 같은) 신학자도 계시지만,
저는 '말씀'은, 성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설교는 그것의 조명이라고 봅니다.

제 생각에, 안수받은 목사의 설교를 선포, 즉 '케리그마'로 보는 개신교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사도를 계승한 사제의 자격과 권한, 즉,
성사와 말씀이라는 전례적, 사목적 차원에서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리한다는
종교개혁 이전부터 그리스도교가 견지해왔던 사제권의 개신교적 변형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정작 여전히 역사적 사도계승을 사제직의 근거로 삼는
천주교와 정교회, 성공회 등은
사제의 설교를 하느님의 말씀 선포라는 차원으로까지 높여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지요.
좀 모순이 느껴집니다.

그러한 모순이 발생하는 까닭은 나름대로 이해가 가긴 합니다.
개신교가 사제직 및 사제권을 한편으로는 부정했으면서도,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 권위를 유지해 왔다는 것입니다.
주교가 베푸는 성품성사에 의한 사도계승을 부정하고,
새로운 목회 직제인 목사직을 만들었지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권위', '권력'이라는 유산은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지요.

개혁파 교회가 예배에서 성찬의 전례를 삭제한 것은,
(하지만 칼뱅은 적어도 매 주일은 성찬을 베풀어야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츠빙글리와 제네바 시는 성찬을 1년에 두번, 네번 정도로 축소했는데,
종교개혁 이전,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인 성체를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공경한 탓에 거의 영성체를 하지 않아서,
1년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영성체하도록
교회가 규정을 정한 데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중세 교회가 범했던 성체성사(성찬)의 참뜻을 훼손한 오류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이로써 결국,
교회 및 그리스도교 생활의 가장 중요한 일인 예배에서
목사의 설교가 중심으로 부각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자연히, 설교는
목사의 권위, 권력을 수립, 생산, 강화하는
가장 좋은 도구로 사용되어 왔던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너무 반개신교적이고 부정적인 평가인가요?

그리스도교 및 신자 개개인에게 주어진 '텍스트'는,
오직 성서 말씀이지,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설교가 텍스트의 지위를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
설교마저 성서와 더불어, 또는 이보다 정도를 지나쳐
성서보다 설교가 텍스트의 자리를 찬탈해 버린다면,
자신의 절실하고 구체적인 실존 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되며,
심할 경우 그리스도교가 아니라,
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아무개목사교'로 타락해버린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서 말씀 그 자체를 말씀의 전례 내지 예배의 중심으로 받들기 위해서는,
성서 말씀을 듣는 회중들 모두가 그 말씀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기본적으로 전제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교회적, 즉 공동체적, 사도적(역사적)인 것이기도 합니다만,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나와의 의미 생성이라는 실존적 차원의 문제일테니까요.

'이런 차원'에서 설교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에티오피아 관리가 혼자 이사야 예언서를 읽으면서 뜻을 몰라 답답해 하다가
필리포스의 가르침을 받아 구원의 진리를 깨닫고 그리스도를 믿었듯이 말입니다.
그럴진대, 설교에 길고 많은 내용을 담는다고 좋은 건 아닐 것입니다.
많은 생선을 주려는 설교보다는,
스스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설교와 교회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비록 평신도이지만, 졸업한 이후에도
계속 교회와 신학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는 저는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일단 국어 교사가 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언어 교육, 즉 사고와 소통의 교육이 모든 것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준비하는 국어 교사의 길 또한
사제 또는 목사 못지 않은 성소(聖召)라고 봅니다.
이것은 주체적 자아를 세우고,
자신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여
보다 의미있는 행동과 삶을 선택하게끔 도울 것이라 믿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성숙의 가장 기초이기도 하리라 보기 때문입니다.

설교와 교회 교육도 이와 같아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이거 순전히 그분의 은총이 아닙니까?
이에 대한 믿음 역시 그러하며,
인간의 입장에서 주체적, 실존적 결단으로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선택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 영역에 속해 있을진대,
하향적, 일방적, 강압적, 권위적 언어의 주입과 재생산이라는 인간적 방법으로
믿음이 생길 리가 없는 것입니다.
(칼뱅주의 신학은 '거부할 수 없는 은총'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만,
인간의 자유, 즉 주체적 선택 능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건 은총이 아닌 강압과 주입이니, 모순 명제가 됩니다.
그리고, 주입하는 권위적 명제로서 믿음이 생기지 않고,
도리어 반그리스도교, 반교회적 정서와 근본주의적 폭력성 등의
복음의 정신에 반하는 역작용만을 불러일으켰다는 역사적, 결과론적 측면을 생각해 봐도,
이 주장은 부당하다고 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당신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자유,
이 두 축이 설교와 교회 교육의 중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두 중심점 가운데에서 정녕 나에게 절실한
'의미'가 생성된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맞춘 교회의 전례주년을 따라
성서일과대로 성서를 읽고, 설교와 교회 교육만 한다 해도
주일 예배에서만 3년에 성서를 한 번 통독할 수 있으니,
하느님의 구원사의 맥락을 관통해서 인식시키는 데 훨씬 효율적일 것입니다.

평신도들에게 신학과 성서학, 교회사에 대한 기초 지식과 방법론을 알기 쉽게 가르쳐야 합니다.
성서 공부 시간이라든지, 설교 중에 녹아들게 해서 익숙하게 만들어야 되지 않을까요.
그 텍스트에 걸맞는 올바른 해석학이 아닌, 엉뚱한 방법론을 갖다붙여 읽는 것은,
마치 나사 푸는 데 드라이버 대신 장도리를 갖다대는 상식 이하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유독 교회 안에는 그러한 일이 편만해 있다는 말이지요.
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행태를 당연하고 유일하게 맞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심각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사에 장도리를 갖다대면 나사가 풀리지는 않지만,
언어로 된 성서 말씀은 엉뚱한 해석 방법을 갖다붙여도 어떻게든 말은 만들어지니,
이게 더 위험하고, 사람 잡는 게 될 것입니다.
이래서야, 그리스도인들이 어찌 말씀 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겠습니까?

저는 아직 사목(목회)자도, 설교자도 아닌 탓에 생각만 있지,
아직 구체적으로 어찌할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습니다.
(갖추도록 힘써야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들을 구체화시켜 보고 싶은 소원은 늘 갖고 있습니다.
학교 현장에서든, 사목(목회)의 장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