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마음에 이것 저것 막 쓰다보니 글이 너무 길어져,
아예 새 글로 올립니다.
제가 월요일부터 3일간 학회를 가거든요.
글은 못 쓰겠지만 다비아엔 종종 들어올 수 있을 겁니다.

그럼 균형님께,

창조과학은 두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앞의 창조는 균형님이나 제가 똑같이 고백하는
‘하나님에 의한 창조’를 믿는 것입니다.

창조론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
창조과학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창조란
철저히 문자주의적 성경 해석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24시간 씩 6일동안에 창세기에 쓰여진
그 순서대로 그 내용대로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거지요.

님께서 창조과학이 진화가설 (참고로 과학계에 이런 단어는 없습니다)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하셨는데 절반은 맞은 셈입니다.
그 나머지 절반은, 당시 신학의 흐름에 대한 반발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등비평을 비롯한 여러 신학적 흐름들이
성경의 권위를 바닥에 떨어 뜨렸다고 생각하여
문자주의적 성경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한 사람들과,
제 7일 안식일 교회 목사였던 프라이스란 사람의
‘홍수론’ (노아의 홍수가 모든 화석들과
현재의 지구 지형을 낳게 한 유일한 원인)의 만남이
바로 창조과학의 시작이니까요.

냉정히 말씀 드리면 진화론은 이들이 만난 이 후
찾아낸 공동의 적이라 할 수 있고,
이 두 그룹의 근본 바탕엔 성경의 권위회복이라는
한 가지 목적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 창조과학회의 동기도 바로 성경의 권위회복이라는데엔
본인들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문자주의적 해석이야
기도교내에서 또, 신학적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문제이지만,
뭔가를 과학이라 주장하려면, 당연히 과학계에서의
평가를 각오해야지요.

위키 백과사전을 보니 과학을 아래와 같이 정의 하였더군요.

“과학이란 인류가 경험주의와 방법론적 자연주의에 근거하여
실험을 통해 얻어낸 자연계에 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다.
과학자들은 자연계에서 관찰되는 현상들을 과학적 방법론에 따라
자연적인 (초자연적이지 않은)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과학적 방법론(scientific method)이란 연역과 귀납의 논리학을 바탕으로
관찰-이론-실험-재현을 바탕으로 한 과학, 즉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통칭한 말이다.”

Noll박사의 글은 연역과 귀납의 논리학으로
창조과학자들의 주장들이 어떻게 허물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성경적 또는 신앙적 관점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 창조과학자들의 “하나님이 윤리체계를 설정해 주지 않았다면,
인간은 방종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에 대해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인간들은 윤리 도덕 체계를 얼마든지 세울 수 있고,
하나님 역시 인간 행위에 큰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해명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에 대한 반론은
‘인간들은 스스로 윤리체계를 세울 수 없고,
하나님은 당신이 명령하지 않은 인간 윤리에는관심을 갖지 않는다’ 라는
것을 다시 논리적으로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성경관을 떠나서 저자의 논리체계가 잘못되고
창조과학자들의 논리체계가 옳다고 판단되면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씩 하나씩 논리적으로 비판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사실 저 역시 그러한 글을 아직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제를 과학 쪽으로 돌리죠.
먼저 진화와 진화론에 관해 살펴보죠.

과학계에서 진화는 사실 (fact)입니다.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진화를 굳이 한 마디로 이야기 하자면
‘모든 생물체는 변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진화라는 개념은 다윈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당시 지질학의 발전 (퇴적, 융기, 침식등의 과정이 잘 밝혀져 있었음)과
함께 수 많은 동, 식물의 화석들이 발견됩니다.
단순한 화석의 배열 만으로도, 그 당시의 박물학자나
아마추어 과학자들은 (그들 대부분이 성직자였음)
곧바로 생물의 변화를 추론할 수 있게 됩니다.
수 많은 화석들로부터 얻은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은,
그 대부분의 생물이 오늘날엔 존재하지않는다는사실입니다.
화석이 발견된 지층의 지질학적 연대 (그 정확성은 지금에 비해 많이 떨어집니다만)를
통하여 지구의 나이도 당시의 일반적 생각보단 훨씬 길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시간에 따른 생물의 변화를 그들은 진화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상당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생물체가 진화한다’라는 사실이
과학계에 정식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 변화의 작용기작 (mechanism)이 빠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변화하는건 알겠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설명(이론)이 없었다는 이유입니다.

잠깐, 다른 예를 하나 들지요.
기상학은 주류, 정상과학입니다. (하도 유사, 사이비과학이 많아서
요즘은 그냥 과학이라고해선 부족한가 봅니다)
그런데 태고적부터 인간들은 먹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경험적 증거는 넘쳐 난 거지요.
그러나 과학의 한 분야가 되기위해선, 그 먹구름은 어떻게 형성되고,
또, 어떤 상황에서 그 먹구름이 비가되느냐는
‘작용기작’이 서술되기를 기다려야 했던 겁니다.

기상학의 일기예보는 과학이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일기예보는 미국이나 한국 모두 퍼센티지를
사용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 올 확률 35% 또는 70%.
실 생활에서 우리는 비가 오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35 %는 뭐고 70%는 도대체 뭘까요?
그건 과학이 최대 근사치를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그 서술방법이 정량적이라는데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은 그 양적 변화를 측정할 수 있을 뿐이지
질적인 것의 측정은 과학의 영역 밖의 문제인 것이죠.

따라서 오늘  비 올 확률 70% 예보가 나왔는데 비가 안 올 경우
사람들은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질적 판단) 불평 하는데 반해
기상학자들은 오늘은 나머지 30%가 일을 했다며 (양적판단)
한숨 쉬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기예보가 자주 틀린다고 해서
기상학 (대기학)이 설명하는 먹구름의 생성과정 자체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실수가 생길까요?
우리가 먹구름의 생성요인과 비가 내리는 조건들에 대해
아직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 하나 규명해 가면서 부족한 점들이 채워지겠만
그렇다고 해도 70%에서 71%로의 증가하는 식이겠지요.
다시말해 여전히 비가 안오는 날이 있을거란 이야기.

진화란 사실에 대한 경험적, 물질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 작용기작을 몰라서 과학의 변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다윈입니다.

다윈은 당시까지 쌓였던 증거에다 자신의 오랜 관찰 결과를
더해 두 가지 작용기작을 제안하게 됩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온
생물체내의 무작위적 ‘변이’와 ‘자연 환경에 의한 선택’ 말입니다.
논리적 추론만으로도 이 두 이론은 그 동안의 궁금증에 대해
충분한 답을 줄 수 있는 이론임에도
당시 많은 과학자들에 의해 즉각 받아들여지진 않습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새로운 설명은 더 많은 질문들을
불러 일으키는 과학의 근본 생리가 작동한거죠.
자연 선택은 논리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생물체의 변이에 대해선 그 당시 과학자들로선
쉽게 수긍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 다시 그 작용기작 (어떻게?)이 문제가 된 거죠.
이번 경우엔 그 물질적, 경험적 증거도 없는 마당이니까요.

어떤 과학적이론이 한 이론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다른 이론들 보다 더 많은 것을 설명하면서
그 이론을 뒷 받침할 실험적 증거들이 보충되어야 합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위의 두 가지를 모두 통과하며
오늘에 이릅니다.
많은 대안적 이론 (라마르크의 진화론등)속에서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인정을 받음과 동시에
현대 유전학의 발전으로 무작위적 ‘변위’의 실체와
그 작용기작이 해명되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다윈의 진화론이 완벽하다고 주장하는건 아닙니다.
과학에서 완벽함을 찾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유사, 사이비 과학을 구별하는 아주 쉬운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이 차이점을 잘 고려해 보는 것입니다.

다윈 이후 유전학, 분자 생물학, 생태학의 괄목할 만한
발전으로 진화론은 많은 수정과 보완 과정을 겪습니다.
그럼에도 변이와 자연선택이라는 두 가지 작용기작의
골격은 남아있기 때문에 여전히 ‘다윈의 진화론’이라불리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정과 보완이라는 과정이 때론 아주 격렬합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과학자들 사이에
속된 말로 목숨걸고 싸우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거든요.
가끔 창조과학자들이 주류 과학자들이 이러한 논쟁을 예로 들면서,
과학자들도 진화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서로들 싸운다고
왜곡하곤 합니다.
의도적으로 진화와 진화론을 같이 묶어 버리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논쟁은 진화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작용기작에 관한 논쟁인 것입니다.
그들이 진화를 부정한다면,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작용기작을 인정 받기위해  그토록 싸우겠습니까?

이쯤해서 우리들이 보다 관심을 갖는 창조과학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죠.

창조과학의 주장은
“창세기 1장의 내용은 문자적으로 정확하며
과학적으로도 정확하다”입니다.
과학의 정의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 순간 ‘아, 이건 과학이 아니구나’하고
바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미 결론이 났고, 어떤 근거에서든 자신들의 결론이
옳다고 전제하고 있는 상태에선
과학이란 게임의 규칙들을 따라야 할 이유도
또 따르고 싶어도 따를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란
자신들의 주장에 영향을 줄 만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 입니다.
모은 자료를 어떻게 분석하는지는 님께서도 짐작하실거라 믿습니다.
이건 과학이 아닙니다 (위키 사전의 정의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세요).
과학자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구요.

과학에서 증명의 부담은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쪽에 있습니다.
균형님께선
“그들의 방식이 과학적인 해명인 만큼, 창조과학에서 말하는 내용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하겠지요” 라고 했는데,
실제론, 창조과학이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그래서 자신들이 주장하는게 과학적이라는 증명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균형님께선
“창조과학이, 과학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의 한 주제에 대한 해명”
일 수 있으며,  “창조과학의 시도를 과학의 범주 안에서 보는 이유는
그들의 시도가 입술의 신앙고백 차원뿐 아니라 과학이라는 범주 안에서
과학의 도구와 방식을 사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님의 생각이 그들에 대한 단순한 심정적 동감인지
아니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는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만,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죠.
님께서도 이미 ‘날로 먹지 않겠다’는 의도를 표시했으니까요.

균형님의  ‘창조과학이 과학이라는 범주안에서 과학의도구와 방식을 사용한다’라는 생각을
확인시켜 줄 만한 근거를 몇 가지만 들어 주실 수 있나요?
도움이 필요하면 창조과학회 홈 페이지에 가보세요.
창립된지 25년 (미국은 80년)이 넘었으니 과학의 도구와 방식을 사용하여 맺은
열매가 있지 않을까요?
만일 창세기의 과학적 증명은 그 규모나 어려움이 너무커
25년 정도론 불가능하다면,  설사 몇 백년이 걸리더라도
이러한 과학적 방법으로 이러 이러한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라는 식의
계획이라도 있지 않을까요?

제가 ‘없습니다’ 한다고 해서 믿을 필요도 없고, 또 그대로 믿어서도 안되지요.
꼭 직접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홈페이지 방문하신김에 창조과학회 이사라는 임번삼씨의 글을 빼지 말고 읽어 보세요. 제가 조금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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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미국 컨콜디아사에서 발간한 '중국한자 속에 나타난 천지창조' (The Discovery of Genesis)를 번역하고 있다.

이 책은 1988년 독일출장 중에 발견한 것인데, 중국한자에 하나님의 역사가 담겨 있다는 내용이다. 읽을수록 나를 사로잡았기에 번역을 결심했다.

약 5만자로 추산되는 중국의 한자는 상형문자 6백여 개, 표의문자 7백여 개, 표음문자 2만여 개로 되어 있다고 한다. 한자 형성 시기는 BC 24세기쯤으로 성경역사에 비춰보면 바벨탑 사건 직후가 된다. BC 2230년 중국은 동지와 하지 때 하늘을 향해 제사를 드렸다. 그 비문에 이런 내용의 글이 적혀 있다.

'오성(五星) 운행 전 태양과 달 있기 전 공허와 암흑 뿐 이 땅 창조 전 찬란한 영광만 빛나는 하늘에 대전쟁 있었노라. 우주통치자 신황(神皇)이 왕으로 오셔서 선악을 분리시키셨도다. 그분이 하늘을 열고 땅 펴시고 인간을 자기 모양대로 창조하니라. 그분 능력으로 천지와 만물이 지음 입었노라' 4천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를 알리는 내용이 중국제사 비문에 적혀 있을까. 상형문자를 보면서 나는 더욱 놀랐다.

선(船)자는 배 주(舟)에 여덟 팔(八)자와 사람을 나타내는 입구(口)자로 되어 있어 노아의 방주에 8명이 탄 것을 암시한다. 또 창조한다는 지을 조(造)자는 먼지와 흙을 나타내는 토 (土)자에 입 구(口)자, 동작이나 생명을 나타내는 1획, 사람이 걸을 수 있다는 之로 구성되어 있다. 창세기 2장 7절은 이 지을 조(造)자를 그대로 증명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土)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口) 불어 넣으시니 (丿)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辶)'

중국인 찬첸킹 목사와 미국 해부학의사인 넬슨 여사가 같이 집필한 책 '중국한자 속에 나타난 천지창조'의 내용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확실히 증거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는 중국은 유교 도교 불교 등이 발생하기 전 약 2천년간 유일신인 하나님만 믿어왔다고 밝힌다. 당시 하나님을 썅띠(上帝), 센(神), 솅링(聖靈)으로 불렸다. 이것은 발음상 샹, 셴, 솅등과 유사하며, 이는 히브리어의 하나님 칭호인 샤데(샤다이)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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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임번삼씨는 이 처럼 중대한 업적을 공개적인 학회같은데서
떳떳이 주장하지 못하고 교회 안으로만 가지고 들어올까요?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주축으로)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걸까요?
제 생각엔 손해볼께 없는 장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일거 양득입니다.

과학계로부터 처참한 대우를 받을수록
이들은 자신들에게 순교자적인 이미지를 붙여나갑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당해야 할 당연한 핍박인거죠.
그들에게 동조하는 교회 지도자나 일반 신도들의 입장에선
속세에서 잘 나가는 과학이 내가 믿는 성경이 옳음을 입증해 준다니
이 또한 반갑지 아니 하겠습니까?
일말의 불안감을 덜어주는 차원도 되구요.
(왜 그러한 입증이 필요한가에 대해선
저도 지금까지 파악을 못하고 있습니다만).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성경의 문자주의 해석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창조과학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창조과학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두 문자주의자들만은 아니라는 점을 밝혀둡니다)

따라서 창조과학회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진화/창조의 논쟁여부가 아니라
올바른 과학의 정의와 의미가 제대로 알려지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과학자들(기독교인이건 아니건)의
그 동안의 침묵과 소극적 반응엔 당연히 그 책임을
물어야 할겁니다.

제가 신학자의 글을 번역한 이유는
과학자 (특히 무신론적 과학자)의 창조과학 비판 글들은
너무 잔인하기(?) 때문입니다.
창조과학자들 스스로가 성경을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수술대에 던져 준 셈인데,
얼마나 잔인하게 파 헤치겠습니까?

과학적 방법론으로 성경을 해부하기 시작하면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가 그대로 찢겨 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예수님의 부활,
바로 찢겨 나갑니다.
왜냐구요? 다시 한 번 위키백과의 과학에 대한 정의를 읽어 보세요.
거기에 한 가지 더,
어떤 사건이든 일회성 사건은 과학에선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 사건의 일회성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까?

“왜 창조론을 뒷받침 하는 과학적 근거를 찾지 못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그들 스스로가 “신의 영역은 인간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서
과학적 근거를 찾을수 없다”는 답을 하면서도 과학을 한다고 우겨대는 그들,
또 그들과 함께 소위 ‘창조사역의 길’을 떠나는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을 바라보는 현실이 슬픕니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들이 천지에 널려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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