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간 동안, 쟁토방에서 인간 이성의 가능성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러 상념이 교차했다는 것을 말하면서 글을 시작합니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과연 신을 아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가?
또는 과연 인간의 이성이 신은 고사하고라도 인간 자체 이해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에 대한 열띤 토론이 있었고, 비록 서로 의견의 일치는 보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자신의 지점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자리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일단 소통가능성과 그 한계를 노정한 상태에서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모양새입니다.

제가 느낀 점은,
데미님은 인문학적 성서읽기에서, 합리적 이성이 자칫 성서의 근본적인 진리문제를 형해화시키는 오류에 까지 다다를 것이 아닌가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인문학적 상상력이 진리 자체를 드러내기 보다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를 도출할 지 모른다는 생각은 일면 타당하고 곱씹어봐야할 대목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상상력의 빈곤으로 인해서 진리가 숨막히는 상황이 그간 한국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역사였다는 사실은, 소위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분들이 깊게 반성해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동은 -인문학적 성서읽기- 그간의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운동이고, 엔티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볼테르님의 입장은, 주로 데미님의 논리의 허점을 파고드는 양상이었지만, 그 근저에는, 논리의 틀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있습니다. 인간 합리성의 한계를 열심히 지적하고 노출하려는 데미님에겐 좀 뼈아픈 상황인데, 볼테르님의 한결같은 주장은, 인식론적인 틀로는 존재론적인 인간 내지 신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보다는 진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보자는 의견입니다.

제 짧은 생각은,
그렇다면, 인간의 합리적 이성은 진리 인식에 어떻게 복무하느냐에 관한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즉 진리로 이르는 상상력을 주는 한에서 합리적 이성의 가능성과 한계가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인문학적 성서읽기식으로 본다면, 진리 인식에로 인도(접촉점)하는 한에서 합리적 이성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 진리 인식에 벗어나는 점에서 그 한계가 노정된다고 봐야할 겁니다.

과연 그 접촉점이 어딘지!

정목사님의 한결같은 설명은, 차원의 문제인데요.
자연과학은 인식론적 차원이고 신 이해나 인간이해는 존재론적 차원이다...

인식론적 차원인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인간의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서 신 이해라는 존재론적 차원으로 진입하는데, 그 접촉점이 인간의 자기 초월이라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본래적인 자기초월 -생명 전반에- 가능성이 내재한 존재라는 것이 기저에 깔려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해석했는지 모르겠네요..
오해가 있으면 이해를 부탁드리면서...

숨고르기가 끝나면, 다시 토론에 임하실 데미님과 볼테르님 그리고 다비안들에게 한번 읽고 시작하면 어떨까해서 글을 좀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켄 윌버라고 세기연에 있는 글인데요. 정강길님이 올린 글입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g00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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